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20대 대부분을 시험을 준비하고 실패하는 데 썼습니다. 재수, 편입 준비, 영어, 컴퓨터 같은 각종 자격증 시험을 시도했지만 모든 시험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기숙학원에 들어가 밥 먹는 시간 10분, 잠자는 시간 4시간인 생활을 계속하며 집에도 가지 않았지만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고요. 대학에 다니다 중퇴하고 혼자 편입 시험을 준비했지만 합격할 성적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다못해 영어 전공이었는데 토익 시험 점수도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수준이었습니다. 유학 올 때도 영어 시험 기본 성적이 안 돼서 원하는 학교에 원서조차 넣을 수 없었어요. 유학 와서도 일주일 내내 학교 오픈 시간부터 문 닫는 12시까지 어느 학기에는 매일같이 하루 2시간도 못 자면서 공부했지만 전 과목 낙제를 받았어요.
결과가 아쉽고 당시에는 최선의 노력에도 실패만 계속되는 과정이 힘들었지만, 현재는 신기하게도 그 과정이 모두 성공이었을 상태와 비슷한, 살고 싶은 곳에서 마음에 드는 주거환경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또, 저 자신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열심히 했기 때문에 후회나 미련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진짜 내게 즐거움을 주는 공부를 해서 대학원에 들어가야지 하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내면은 다른가 봅니다. 매일 행복하고 편안하게 사는데도 공부하는 꿈을 자주 꿉니다. 유학 오기 전에는 벌거벗은 채 고등학교에 가서 시험을 보거나 학창 시절 친구들과 생활하는 꿈을 꿨어요. 자고 일어나면 매우 불쾌한 꿈이었어요. 그런데 요즘엔 꿈을 꾸고 일어나면 왠지 공부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꿈을 꿉니다.
이를테면 꿈속에서 안 본 지 오래된 친척들을 만났는데 우리 집에 함부로 들어와서 멋대로 물건을 쓰고, 정리도 안 하는 꿈을 꿨어요. 치우라 해도 제 말은 듣지 않고, 모두 인정하는 똑똑한 사촌의 말만 듣더라고요. 그리고는 새벽에 일어나 전공책을 읽었어요. 얼마 전에도 돌아가신 할머니 꿈을 꿨는데 공부를 다시 시작하라는 뜻 같아서 온라인 대학 강의를 알아봤고요. 오래된 교정의 명문대를 무거운 전공책을 들고 강의 들으러 가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모든 꿈이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일어나면 항상 드는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입니다. 수능을 다시 봐서 원하는 점수를 받고 원하는 대학 합격증을 받아 내야 안 꾸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아무리 바랐던 학교라도 지금 다시 들어가서 4년 동안 20대 어린 친구들과 생활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공부하고 자리에 앉아도 도대체 무슨 공부를,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인터넷에서도 저처럼 수능을 다시 보는 꿈이나 교복을 입고 지각할까 봐 학교로 뛰어가는 꿈을 여전히 꾼다는 이야기를 많이 봤는데요. 도대체 이런 꿈을 왜 계속 꾸는 걸까요? 악몽마냥 기분이 좋지 않은 꿈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답변) 안녕하세요. 대학 입시로부터 상당 기간이 지난 지금까지 입시 관련 꿈, 공부에 관한 꿈을 반복적으로 꾸고 계셔서 힘드신 상황이군요. 현재 삶이 만족스러운 상황임에도 왜 이런 꿈을 계속 꾸는 것인지 궁금하신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들은 흔히 힘들었던 시기에 관한 꿈을 반복적으로 꾸고는 합니다. 남자분들이 군대에 재입대하는 꿈을 꾸거나, 성인이 된 후에도 학창 시절로 돌아가서 다시 시험을 보는 꿈을 꾼다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런 꿈을 꾸는 이유는 아마 그때의 기억이 그만큼 강렬했고, 몸과 마음에 큰 부담과 압박감을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인 또는 주변, 사회에서 정해 놓은 규칙이나 기준, 합격선을 맞춰야 하며 실패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큰 부담으로 작용한 것이지요,
사연자님 역시 입시와 대학 시절 다양한 시험과 도전을 마주하면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담감과 실망감, 좌절을 경험하셨을 테지요.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노력만큼 나오지 않는 결과로 자신감과 자존감이 낮아지는 느낌을 받으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투자한 노력이나 시간 대비 돌아오는 성과가 없는 것 같아 허탈감도 느끼셨을 것입니다.
다행히 현재는 원하는 환경에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으며, 최선을 다한 자신과 지난 시간에 대해 후회나 미련이 없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과거의 실패에 대한 회한이 남아 있으신 것 같습니다.
마땅히 통과하고 성공했어야 할 일들을 해내지 못했다는 ‘미완결감’이 반복적인 꿈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현재의 삶이 객관적으로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사연자님의 내면에서는 ‘내가 이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가, 내 힘으로 이룬 것인가’하는 의구심과 함께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타인의 시선에 대한 의식이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친척분들이 사연자님의 집을 마구 헤집어 놓은 것에 관한 꿈 내용을 읽으며 사연자님이 친척분들이나 주변분들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성공하지 못한 사연자님, 매번 도전할 때마다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사연자님’이라고 주변에서 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사연자님을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꿈에서 친척분들이 헤집어 놓은 ‘집’이라는 공간은 가장 사적이고 독립적이며, 지키고 싶은 소중한 곳, ‘사연자님 자신’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연자님의 내면을 타인의 평가와 잣대가 혼란스럽게 하며 사연자님이 바로잡으려 할 때도 ‘똑똑한 사촌들’과 같이 일반적으로 성공했고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외부적 평가 기준이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외적 평가와 관계없이 소중한 존재라고 자신을 인정하고 지키고 싶은 사연자님과 평화를 깨뜨리며 사연자님의 내면을 헤집어 놓는 외부의 평가, 그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 같은 사연자님의 마음이 꿈을 통해 잘 드러난 것이 아닐지요.
할머니와 관련된 꿈의 내용을 자세히 적어 주시지 않아서 상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그 꿈 이후 공부를 다시 시작하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 역시 할머니가 사연자님이 다시 공부하길 원하는 것 같은 기대감에 대한 인식, 그에 따른 부담감과 압박감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사연자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변분들이 사연자님의 지금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공부를 통해 더 나은 사연자님의 모습을 입증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는 부담감을 느끼고 계신 것이 아닐는지요.
벌거벗은 채 고등학교에 가서 시험 보는 꾸는 꿈 역시 ‘시험’, ‘공부’와 같은 상황에서 많은 압박감을 느꼈던 사연자님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가장 취약한 모습,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입니다. 사연자님께는 공부라는 것이 그렇게 타인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 나의 가장 약한 모습과 연합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고 늘 실패감을 주었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과거에 공부를 통해 입증하지 못한 실력이나 성공, 존재 가치를 지금이라도, 또 다가올 미래에도 계속 입증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꿈을 꾼 후에 온라인 대학 강의를 알아보신 것도, 명문대 학생이 되어 교정을 거니는 꿈을 꾸신 것도 그런 맥락이겠지요. 세상에 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 지금 내 모습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공부와 관련된 꿈을 유독 자주 꾸시는 것은 이런 사연자님 내면의 해결되지 않은 혼란과 갈등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하면 이런 꿈을 꾸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연자님이 먼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살면서 우리는 스스로 정해 놓은 기준이나 외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때로는 그런 부담감이 노력과 성취, 발전을 위한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는 실망감과 자괴감,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것에 대한 부담감, 수치심을 가져옵니다. 심한 경우 실패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나 기대치를 바꾼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많은 대화와 시간, 노력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먼저 나 자신이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무엇을 이루거나 무엇이 되어야만 사랑받을 만한 나, 괜찮은 나, 존재 가치가 있는 나로 스스로를 바라보았던 시선을 바꾸어 성취나 결과에 관계없이 존재 자체로 소중한 나로 자신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 실패한 나 역시 나이며, 비록 결과가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노력하고 최선을 다한 자신을 보듬어 주고 자랑스럽다고, 수고했다고 인정해 주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살면서 우리는 많은 시도와 성공, 실패를 경험합니다. 공부라는 영역에서는 그동안 실패의 경험이 많았지만, 그것이 사연자님이 능력이 없거나 존재 가치가 없는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반짝이는 보석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은 ‘입시’, ‘대학’, ‘성공’과 같은 한 가지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내 안의 보석에는 시선을 두지 못한 채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사연자님 안에는 아직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지 모르는 보석이 있음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앞으로 공부가 되었든 다른 영역에서의 시도가 되었든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사연자님께 즐거움을 주고,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는 도전을 해 보셨으면 합니다. 타인이 원하고 사연자님께 기대하는 것이 아닌, 사연자님이 진정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 잘하는 영역이 무엇인지 찾아보시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공부’라는 한 가지 영역에 사연자님의 가능성과 존재 이유를 제한하지 마시고, 다양한 영역을 경험해 보며 미처 몰랐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끊임없이 발견해 나가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