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나를 태우는 또 다른 나 (24)

[정신의학신문 : 대한불안의학회 신영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리는 집보다 직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그에 따라 가족보다 직장 동료와 더 많은 관계를 맺기도 한다. 직장은 곧 하나의 큰 커뮤니티이며 주 생활 반경이기 때문이다. 가정 내 불화나 갈등이 있으면 가족이 한 공간에서 지내는 게 괴로워지듯이, 직장 또한 마찬가지다. 살아온 과정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 및 문제는 다양하다. ‘기업 정신연구소’는 직장인들의 마음 건강을 분석, 평가하고 치유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왜 기업에서 직장인들의 정신건강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가끔 기업체 대표를 만나면 이렇게 묻는다. ‘대표님 기업에 고문 변호사 있죠?’ 대부분의 경우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고문 정신과 의사는요?’, ‘고문 심리 전문가는 있나요?’라는 질문에는 고개를 젓는다. 이처럼 많은 기업체가 직원들의 마음 건강, 정신건강의 필요성, 정신건강 관리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우울하고, 불안하고, 잠을 못 자고, 중독에 빠지는 등의 것들은 개인적인 문제인데 왜 기업에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다. 하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작든 크든 한 기업의 대표라면 누구나 생산성, 일의 효율성을 끌어올리고 싶을 것이다. 기업 정신건강 관리는 이를 위한 필수적인 첫걸음이다.

기업으로 말할 것도 없이 한 개인의 일상을 생각해보자. 울적한 마음이 들고, 불안을 느끼면 몸과 마음이 지치며 당연히 업무에 영향을 미친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사고 위험성도 높아지는 것이다. 기업에서 직장인들의 정신건강을 관리하는 것은 복지이면서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투자다.

 

‘EAP(Employee Assistance Program, 근로자 지원 프로그램)’는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대해 해결방안을 지원하는 기업 복리후생 제도를 말한다. 이미 많은 외국 기업에서는 1970년도에 활성화되었으며,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많은 기업이 EAP의 효과를 알아가고 있다. EAP는 힘든 상황에 처한 직원을 도와주는 역할과 병적인 상황이 아니라도 고위험군으로 넘어가지 않기 위해 예방을 위한 역할 즉, 두 가지 트랙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EAP, 리더의 변화

EAP를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의 태도이다. 윗물이 아랫물로 흐르듯, 리더의 태도 변화가 기업 전체의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올 수 있다. 현재의 한국은 윗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탑다운 형식의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아래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난다면 참 좋겠지만, 이는 한국 기업 현황에서 이상에 가까울뿐더러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지만 기업의 대표나 리더가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훨씬 빠른 변화를 꾀할 수 있다.

직장의 문화는 인력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직장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고용하고, 이직률을 줄이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직장의 리더가 직원들의 정신건강을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복지 차원 및 투자로 인식해야 한다. 리더의 생각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회사 보고 왔다가 상사 보고 떠난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말이 어떤 의미를 띠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수많은 리더가 아직도 20, 30년 전 자신이 경험했던 리더십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방식을 따라 사람들을 대한다. 귀를 닫은 채 입만 열려 있는 것, 소위 ‘꼰대’라고 말하는 소통방식이다.

 

EAP는 리더를 변화시키는 게 중요하다. 단순히 업무적인 코칭을 넘어 평가 태도 및 기업 분석, 경영 분석에도 정신건강이 필요한 이유다. 경영 컨설팅에는 조직문화에 대한 컨설팅, 직원들의 정신건강에 대한 컨설팅이 함께 들어가야 한다. 건축을 예로 들어보자. 컨설트는 페인트칠이나 도배가 아니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 어떠한 결로가 있는지 살피며 복구하는 작업인 것이다.

사진_freepik

 

나의 고민이 인사관리에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까?

기업에 고문으로 정신과 의사가 있으면 직원들은 이러한 고민을 할 수 있다. ‘내가 직장 생활에서 힘든 것들을 털어놓으면, 회사에 전달되어 내게 불리한 작용이 되지 않을까?’ 근로자를 위한 지원 프로그램 EAP 시행 초기에 위 같은 걱정이 많았다. 현재 많이 좋아지긴 했으나 염려되는 부분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내용이나 신상이 노출되지 않는다고 아무리 말해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직원들의 정신건강 관리가 어떤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는지 살펴보면 이러한 고민을 덜 수 있을까?

프로그램은 외부 모형과 내부 모형으로 나뉜다. 내부 모형은 상담 혹은 진료를 맡은 고문이 회사 소속임을 의미한다. 회사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상담에 큰 도움이 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회사를 속속들이 알기 때문에, 회사의 정보가 노출될까 하는 염려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외부 모형을 많이 쓴다. 상담이나 진료 보는 선생님을 회사 외부에서 계약하고 위탁하는 방식이다. 외부 계약 및 위탁은 100% 비밀을 보장하도록 제도적인 보호를 받는다. 정신의학과 의사는 상담 및 진료 기록을 개방할 수 없도록 의료법으로 정해져 있다.

 

직원들의 정신건강 관리, 상담, 진료를 직원을 감시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관리가 아닌 보호 및 케어가 목표라는 점이다. 직원을 직장의 일원으로서 존중하고, 직장이라는 사회 안에서 함께 하기 위한 방안이라는 것이다. EAP는 직원 관리가 아니라, 복지 차원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AP의 효과

직원의 정신건강을 관리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어떠한 효과를 불러올까? 정말 효과가 나타나긴 할까?

1970년대 ‘존슨 앤 존슨’라는 기업에서는 트럭 기사들의 교통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사고율이 높아 보상금 또한 많이 지출되었다. 원인을 분석하니 장거리 운전을 하는 운전기사들의 불안에 그 문제가 있었다. 운전기사들의 업무 및 생활은 불안한 환경을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불안을 바탕으로 곧 수면 문제와 약물 남용의 문제를 불러왔다. ‘존슨 앤 존슨’에서는 원인을 분석한 바로 다음 해에 교육과 상담, 치유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사고율이 40% 떨어지며 기사들의 안전을 지키고 고용 형태를 안정화할 수 있었다. 사고로 인해 지출된 보상금보다 적은 금액으로 근로자의 안전은 물론, 기업의 미래까지 잡은 것이다.

 

마음 건강, 정신건강에 지금 투자한다고 바로 내년에 얼마나 좋아졌는가 하는 수치로 나타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개인의 문제를 의논할 수 있고, 치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회사라면 개인을 즉 한 사람을 단순히 소모품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복지 문화의 형성은 관계를 살피고 갈등을 덮지 않는 데 도움을 준다.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이득이 따라오는 것이다.

 

신영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원 박사
미네소타대학 연구조교수,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소장
대한 신경 정신의학회 중독특임이사
보건복지부 및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 국민권익위원장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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