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진의 [중독 인생을 위한 마음 처방전] (19)
[정신의학신문 : 신림 평온 정신과, 전형진 전문의]
어떤 행동이 건강을 해치고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것을 알면서도 이를 조절하지 못해 반복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강박을 중독이라고 한다면 자기가 하는 일에 과하게 몰두함으로써 중독 증세를 보이는 걸 일 중독이라고 할 수 있다. 일 중독은 일하는 과정에서 얻는 가치와 보람도,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우정과 신뢰도 경험할 수 없게 만든다. 건강한 생활양식이어야 할 직업에 사생활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오로지 일만 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일 중독증(Workaholic)은 의학 용어도 정식 병명도 아니지만, 많은 현대인이 겪고 있는 사회 현상인 동시에 정신과 육체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병적 증상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서구 사회에서는 치열한 경쟁이 일상화되면서 누적된 과로로 급작스레 사망하거나 과로를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등 일 중독이 큰 사회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한국인의 노동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길기로 유명하다. 2018년 조사에 의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중 한국이 세 번째로 장시간 일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나마 노동환경이 많이 개선되면서 낮아진 수치다. 2019년 고용노동부의 고용노동통계연감에 따르면 주 5일 근무하는 근로자의 경우 일주일에 평균 2.3일 야근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3일 이상 야근한다고 응답한 사람들도 43%나 됐다. 게다가 집에서 회사까지 출퇴근하는 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제일 길었다. 회사는 도심에 자리해 있으나 근로자들은 도심에 있는 집이 너무 비싸 멀리 떨어진 외곽으로 나가 살 수밖에 없으므로 통근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다. 오랜 노동과 잦은 야근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만원 버스와 콩나물 전철에 몸을 싣고 긴 시간 출퇴근해야 하니 피로가 누적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아침에 멀쩡한 모습으로 출근했지만, 저녁때면 영혼까지 탈곡당한 채 파김치가 되어 퇴근하는 직장인들. 임대료에 생활비, 아이들 학비를 생각하면 한 시도 쉴 수 없어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가게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 자영업자들. 이렇게 매일 같이 자신을 소진하다 보면 정말로 불에 다 타버린 것 같은 상태에 이른다. 이런 상태를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이라고 한다. 일에 지나치게 몰두한 결과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불안, 무기력증, 자기혐오, 분노, 의욕 상실 등을 경험하게 된다. 정열적으로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피로감을 호소하면서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일하지 않으면 자신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 잠시라도 쉬고 있으면 잘리거나 뒤처질지 모른다고 불안해하는 사람, 성취욕과 목표 의식이 너무 높고 뚜렷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번아웃 증후군에 이를 가능성이 크다. 일 중독에 빠진 사람들이다. 과로 사회, 피로 사회는 수많은 일 중독자를 양산한다.
얼마 전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간한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국가 행복 지수 순위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꼴찌 수준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보다 점수가 낮은 나라는 그리스와 터키 뿐이었다. 세계 10위권 내의 경제 대국인 한국이 왜 행복 지수는 최하위권일까? 경제적으로는 예전보다 훨씬 살기 좋게 되었지만, 급격한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에 따른 치열한 경쟁과 갈등이 삶의 만족도와 질을 떨어뜨리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경쟁에서 낙오되면 끝장이라는 강박감과 일할 수 있을 때 더 일해서 한 푼이라도 벌어놔야 노후에 힘들지 않을 거라는 압박감이 자신을 더욱 경쟁으로 내몰고 일 중독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워라밸(‘Work-Life Balance’의 줄임말)이 강조되는 시대다. 일과 삶의 균형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일은 나와 가족의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하다. 일이 나와 가족의 삶을 불행하게 한다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모두가 행복한 일터, 모두가 행복한 가정을 잘 병립시키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요구된다. 회사는 직원을 이익을 창출하는 도구로 여길 게 아니라 공동체의 행복을 가꿔가는 가족으로 여겨야 한다. 따라서 기업은 사원의 건강과 사기 진작을 위한 다양한 제도나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하고, 탄력적 근무제도나 보육과 간호에 대한 지원, 각종 교육과 휴가 제도 등을 정비해야 한다. 직원의 건강이 곧 회사의 건강이고, 회사의 건강이 곧 국가의 건강이다. 출퇴근이 과로와 죽음 사이를 오가는 길이 되게 해선 안 된다.
지난 2018년 2월 국회 문턱을 넘은 ‘주52시간제’는 그해 7월 상시근로자 300인 이상 사업장에 최초로 시행됐다. 이후 2020년부터 50인 이상, 300인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 시행됐으며, 2021년 7월부터는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으로 시행 범위가 늘어난다. 사실상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회사에서 주52시간제가 시행되는 것이다. 정치 경제적으로 여러 기대와 우려가 있고, 시행착오도 있겠지만, 제도적으로 워라밸이 가능해지고, 저녁이 있는 삶이 보장되었다는 차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다. 죽도록 일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는 지났다. 국가적으로는 죽도록 일하지 않아도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민해야 할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일 중독에 빠지지 않고 나와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케빈 브래독이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세계적인 잡지 <지큐>, <에스콰이어> 등에서 기자로 활약했다. 일에 대한 열정과 집념이 강했던 그는 화려한 경력을 쌓아간 끝에 편집장 자리에 올랐다. 잡지 편집장은 마감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전차 같은 삶이 요구되는 자리였다. 정신없이 일에 매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번아웃 증후군에 빠진 것이다. 습관적으로 몸이 아프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삶의 문제들에 압도되어 우울증과 불안증세가 심각해졌다. 술에 잔뜩 취해 자신을 파멸시키고 있는 일을 그만두겠다며 사직서를 쓰고 사무실을 뛰쳐나온 날이었다. 불쑥 알 수 없는 공허감이 찾아와 자살을 시도했다가 친구들에 의해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5년 동안 정신과 병원에 다니며 약물치료와 심리상담을 꾸준히 받은 끝에 회복에 이르렀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할 때(원제: Everything Begins With Asking For Help)』에서 그는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다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우리는 왜 도움을 청하지 않을까? 사실 어려울 것 없이 꽤 간단한 일이다. 입을 벌려 “도움이 필요해요.” 또는 “좀 도와줄래요?”라고 말하면 되니까. 직접적으로 솔직하게 요청하면 된다. …… 말하기는 나 자신을 넘어 바깥세상으로 들어가는 행위로 자신을 실제로 존재하게 하며, 나라는 존재가 남들에게 알려지고 내 소리가 들리게 한다. 그 반대가 수치심이다. 말이 없게 만들고, 앞서 열거한 도움을 청하지 않는 이유의 배후에서 힘을 발휘한다.”
그는 자신이 책에서 한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체면을 차리지 말고 자신을 구제하라.”
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죽을 것 같으면 죽을 것 같다고, 쉬고 싶으면 쉬고 싶다고 말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라는 이야기다. 사람들에게 나약하게 보일까 봐, 상사나 회사의 눈치가 보여서,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돼서, 자신이 건사해야 할 가족들 얼굴이 아른거려서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말하지 않고 버티다 보면 언제 케빈 브래독처럼 쓰러질지 모른다. 수치심과 침묵은 서서히 나를 망가뜨린다. 그의 조언처럼 체면보다 소중한 건 나 자신이다. 나를 구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