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최근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라는 말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을 유추해 보라고 하면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고 조용히 회사를 그만두거나 어느 날 갑자기 직장에서 유령처럼 사라지는 것인가 하고 의아하실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조용한 사직은 실제로 회사를 그만두지는 않은 상태에서 주어진 최소한의 일과 책임만을 다하겠다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소셜미디어의 하나인 틱톡을 통해 ‘조용한 사직’이라는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들이 유행하면서 MZ세대의 새로운 커리어 풍속도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조용한 사직은 직장생활이나 일을 개인의 삶과 동일시하며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었던 기성세대의 문화를 의미하는 허슬 컬쳐(hustle culture)에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일이나 직장에서 행복을 찾기보다는 일은 적당히 하면서 개인 생활과의 균형을 통해 행복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100세 시대로 평생직장 개념이 없어진 이 시대에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 코로나로 인해 대량 해고와 실직, 재택근무 확산, 전업, 전직이 많아지면서 일과 직장에 대한 기존의 사고방식에 변화가 생긴 것 역시 조용한 사직의 등장 배경으로 꼽힙니다. 많은 열정과 시간을 쏟아부었던 회사에서 경영 악화, 업계 불황, 코로나의 영향 등으로 갑자기 해고당한 경험, 일과 직장에 투자한 만큼 보상이 돌아오지 않았던 경험 등이 충성심(loyalty)을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조용한 퇴사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정시 출근과 퇴근, 업무 외 시간에는 응대하지 않기 등의 원칙들을 갖고 실천합니다. 이런 업무 처리 방식과 관련하여 조직의 중간관리자나 임원들은 젊은 세대들과의 소통이나 협업이 어렵다고 고충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당장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는데 퇴근 시간이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남겨진 일은 선임이나 중간관리자들이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가 많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용한 사직이 불과 몇 년 사이에 나타난 MZ세대만의 전유물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산업 및 조직심리학에서는 근로자들이 근무시간에 집중하지 않거나 열심히 하지 않는 문제로 인한 생산성 저하를 연구하면서 ‘태업’, ‘반생산적 행동’을 주요한 주제로 다뤄 왔습니다. 반대로 공식적으로 요구되는 직무 이상으로 조직에 도움이 되는 행동은 조직시민행동(Organization Citizen Behavior)’으로 명명하고 근로자들의 동기 향상을 통해 조직시민행동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반생산적 행동은 결근이나 절도,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행동까지 포함될 수 있다는 점에서 태업이나 조용한 사직과는 다른 범주의 문제라고 볼 수 있겠지만, 태업은 조용한 사직과 언뜻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대충 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질문에는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라고 답할 수 있겠습니다. 조용한 사직을 추구하면서 할 일도 제대로 하지 않고 게으름을 부리거나 업무에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태업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나 조용한 사직이 반드시 태업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용한 사직은 일하지 않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은 다하지만 그 이상의 과도한 업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각에서는 오히려 조용한 사직이 업무 시간 동안의 집중도와 생산성을 향상하는 측면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초과 근무를 하지 않기 위해서 주어진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과거와 같이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당연히 가져야 하는 기본값으로 요구할 수 없다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도 함께 일어나고 있습니다. 조용한 사직이 미국에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워라밸’이 중요한 화두가 된 지 오래입니다. 전쟁 이후의 황폐한 상황에서 한강의 기적, 새마을 운동, 해외 근로자 파견 등을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는 동안 우리 사회는 생산성과 효율성, 성장에 최우선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기업, 국가 주도 사업이 활성화되었고 개인의 삶과 행복은 뒤로 밀려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힘들어도 참고 버티는, 그저 열심히 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졌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기반이 다져진 상태에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성장한 젊은 세대들은 다른 고민을 갖고 있습니다.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이라고 하는 상향 평준화된 입시, 취업 경쟁 속에서 그동안 쏟아부은 노력만큼의 보상이나 성취감을 기대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지만, 막상 그에 부합하지 못하는 조직문화, 연봉을 경험하며 일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는 벽에 부딪히는 것입니다. 본인의 생각이나 의견이 조직에서 수용되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 좌절과 실망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또, 이 일이나 조직이 자신이 모든 것을 쏟아부을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고민에 빠집니다. 하지만 경제적 측면을 비롯한 현실적 사유로 당장 일을 그만두기는 어렵다는 점으로 인해 ‘조용한 사직’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MZ세대를 중심으로 설명했지만 조용한 사직이 반드시 MZ세대에 국한되거나 세대 갈등으로만 해석할 이슈는 아닙니다. 기성세대 중에서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조용한 사직을 실천해 온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조용한 사직의 이유가 MZ세대의 개인주의적 성향이나 성장 배경에 의한 것만도 아닙니다. 세대를 넘어 개인마다 추구하는 가치나 일과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조용한 사직을 하나의 선택지로 고려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용한 사직의 배경과 그 이면에 자리한 심리를 잘 이해하고 그것이 개인과 조직, 사회에 긍정적인 효과를 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성장과 일 중심에서 개인적 삶과 일 사이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도기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조직에서는 조용한 사직을 부정적으로 보기보다는 삶과 일의 조화를 통해 번아웃을 조기에 예방하고, 구성원들이 오랫동안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과 문화를 조성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개인 차원에서는 일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 최대한 관여하지 말아야 할 영역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일의 의미와 성취감, 개인적 성장과 같은 내재 동기를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용한 사직이 일의 의미와 일하는 환경에서의 긍정적 변화를 가져오는 바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미래전략 이사, 사무총장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자문위원회 위원
보건복지부 감사자문위원회 위원
교육청 학교폭력대책 심의위원회 위원
생명존중정책민관협의회 위원, 산림청 산림치유포럼 이사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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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를 듣는 것 같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많은 사람이 도움 받고 있다는 걸 꼭 기억해주세요!"
"선생님의 글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르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