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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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스름한 새벽녘에 출근해 밤늦게 달을 보며 퇴근하는 삶, 직장인분들이라면 많이들 공감하실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9 to 6, 정시출퇴근,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몰려오는 업무를 다 해내려면 야근이 일상이 될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무리하더라도 성과를 인정받고 승진해서 임원까지 올라가는 것이 많은 이의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세태가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뉴스를 보다 보면 승진을 늦추거나 거부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기사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요. 동기들이 모두 과장으로 진급했지만 승진 조건 중 하나인 영어시험을 보지 않고 일부러 대리로 남기를 선택했다는 직장인, 직급이 올라가면 노조가입이 어려워 승진하지 않고 노조원으로 남아 정년을 보장받는 길을 택했다는 직장인, 회사에 많은 시간이나 노력을 쏟아붓기보다는 취미생활이나 자기계발에 더 투자하고 있다는 직장인 등 그 사례는 다양합니다. 이렇게 승진을 미루거나 거부하는 데는 달라진 사회상과 일, 직장에 대한 인식이 기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고속승진해 임원 자리까지 오르는 것을 성공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집값 상승과 경기침체, 물가 상승과 같은 불안정 요인이 커지면서 요즘 직장인들은 ‘짧고 굵게’보다는 ‘가늘고 길게’ 가는 것을 더 선호하며 급여가 적더라도 안정적으로 정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또, 근로소득으로 주택구입, 몫돈 마련이 가능했던 과거와 달리 평생 직장생활을 해도 그 수입만으로는 집을 사기가 어렵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근로소득에 집중하기보다는 근로소득으로 많지는 않더라도 안정적인 수입원을 가지면서 부업이나 재태크를 통한 수익 창출을 추구하는 경향도 가중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직장에 올인하기보다는 직장에서는 필요한 만큼 일하고 남는 시간을 자기 계발이나 부수입을 위한 시간으로 사용하겠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죠. 이런 현상은 특히 20~30대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들어가기가 어렵고 내부 경쟁도 치열하며 부담도 많지만 승진이 잘 돼서 인기가 많았던 본사나 경영전략, 인사과와 같은 곳들이 요즘에는 기피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 배치되면 정시퇴근도 어렵고 업무강도도 높으며 스트레스가 클 텐데, 연봉상승을 비롯한 보상이 그런 부담을 감수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회사가 평생 나를 책임져줄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책임감이나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보다는 더 자유롭고 여유 있는 삶을 누리고 싶다는 마음이 크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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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구인구직서비스업체 사람인이 20·30대 1865명을 대상으로 ‘직장 선택 기준’을 조사한 설문에서는 연봉이 33.8%로 1위, 워라밸이 23.5%로 2순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같은 설문 결과는 워라밸에 대한 젊은 세대의 욕구가 그만큼 크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몇 년 전 해외 직장문화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승진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승진을 미루거나 거부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때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취재원들이 매우 신기하다는 태도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인터뷰 대상자는 승진해서 많은 책임과 높은 업무강도를 견디는 것보다 지금의 상태가 더 좋고 만족스럽기에 굳이 승진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승진을 미루거나 거부하는 것이 그 사회에서는 이상하거나 낯선 일이 아니며,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고 본인이나 주변에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고 덧붙였습니다.

 실제로 유럽을 비롯한 해외에서는 직급구조가 우리나라에 비해 비교적 단순하며 같은 직책 내에서는 직급 구분이 거의 없이 다양한 연령이 섞여 있는 편입니다. 직급은 직무상의 위치나 서열을 의미하는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과 같은 직위의 최소 구분 단위를 말하고, 직책은 팀장, 본부장, 파트장처럼 맡은 일에 대한 책임이나 권한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팀장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직급은 과장, 차장처럼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낮은 직급이라고 해도 팀이나 업무 특성, 개인 역량 등에 따라 직책이 요구되는 위치에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직급보다는 책임, 즉 누가 어떤 부분에서 결정권을 갖고 책임을 지는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또, 연차에 따라 자동적으로 진급되는 시스템이 아닌, 자격증이나 시험 통과처럼 요구조건이 있을 때가 많다고 합니다. 이런 요구조건이 충족되지 않았거나 본인이 진급을 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원래의 직급에 머무르게 되는데 그에 대한 불이익도 없고, 주변에서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도 연봉인상 부담을 줄이고 경력이 오래된 직원을 계속 고용할 수 있으니 손해볼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승진이 반드시 좋은 것, 꼭 해야 하는 것이 아닌 선택사항, 개인의 결정이라는 시각이 예전보다는 많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또, 일이 삶의 전부가 아닌 일부이며, 개인의 삶과 일 사이의 조화를 찾으려는 가치관의 변화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여전히 승진을 꼭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승진 누락자들을 무능력하거나 조직에 도움 되지 않는 사람들로 여기는 부정적 시선도 존재합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킹 더 랜드>에는 항공사 승무원으로 오랫동안 진급하지 못한 오평화(고원희분)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동기들은 모두 진작 사무장으로 진급했지만 그녀는 정석대로만 일하며 원칙을 지키는 스타일로 인해 부진한 실적을 보이고 같은 팀의 사무장으로 있는 동기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습니다. 실적을 올리면 승진 대상자로 올려주겠다는 동기 사무장의 말에 불법까지 불사하며 기내면세점 판매에 열을 올려보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자괴감이 들어 이내 그만둡니다. 그러다 결국 실적을 올리는 데 성공하고, 승진을 기대하지만 사무장이 자신이 총애하는 다른 후배를 승진자로 추천하면서 결국 승진하지 못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물론 드라마다 보니 현실보다 과장된 측면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는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승진에 대한 압박감, 승진하지 못하면 실패하고 무능력한 사람이라고 비춰지는 사회적 편견과 경직된 조직문화를 반영합니다.

 변화하는 시대상과 일, 일터에 대한 인식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승진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바라보고,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를 줄 수 있는 유연한 조직문화가 요구되는 시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 책임과 자유가 양립할 수 없는 상호배타적이기만 한 것인지, 이 둘을 잘 조화시킬 방안은 무엇이 있을지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이루어져야겠습니다.

 

서울역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정희주 원장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역 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졸업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전)성동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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