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나를 인정해 줘”

 

A는 저명한 한 NGO 단체의 이름을 말하며, 자신이 그곳의 사업 본부장이라는 이야기로 자신의 소개를 시작하였다.

본인이 본부장 중에서 나이가 제일 어린 축이라며 조직도를 일일이 설명하거나, 봉사를 위해 결혼도 않고 그간 어떤 사업을 진행해왔으며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장황하게 설명하는 모습은, 마치 아침방송 프로그램에 나온 출연자 같았다.

A가 없으면 그 부서는 식물상태나 다름없어 보였고, 그 헌신 덕에 부서의 실적도 좋은 편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본부장 승진 이후부터 이전과 다른 묘한 불편감이 시작되었는데, 특히 지시를 하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드는 것이 문제였다.

팀원이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이해를 구하기 위해 모든 상황을 설명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본부장이자 멘토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느낌에 여러 가지 조언이라고 생각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느라 늘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게 꼰대라면 꼰대 같은 거겠지만, 우리 팀원 사람들은 그래도 제 얘기 들으면 좀 더 나아지는 것도 보이고요, 지금 한참 예능에서 나오는 그 연예인 같이 제가 사람들한테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맞거든요. 제가 하는 이야기에 실제로 도움들을 많이 받는 것 같으니까 저도 이게 (멘토링) 포기가 안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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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본부장 승진을 하고 새로운 인턴들을 받은 이후부터, A는 점차 잔소리처럼 여러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특히 본인이 원하는 만큼의 호응이나 경탄의 표정이 나타나지 않으면, 원하는 반응이 나올 때까지 이야기가 늘어졌다.

처음에는 자신의 태도나 발화 패턴이 달라진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전과 확연히 다른 '팀원들의 좀이 쑤셔하는' 반응에 몹시 석연찮고 때론 언짢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다 SNS에서 '꼰대의 특징' 이란 글을 보고 문득 자신과 흡사하다는 생각에, 더 정확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이렇게 볼 것이라는 불안감에, 마음이 심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 1박 2일 해돋이 산행 혹은 당일치기 여행 따위를 기획해 다녀오기도 했고, 그런 기회를 이용해 롤링페이퍼나 야자타임을 해 보기도 했다.

이런 때면 자신의 진심이 충분히 전해졌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가도, 다음날 출근하면 어쩐지 여전히 불편하고, 더 이상 자신의 진심이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으며 두근거림과 울렁거림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특히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이사를 하면서 중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은따(은근한 따돌림)를 당하며 사회적 관계에서 배제되는 고통을 일찍 알았던 탓에 지금의 상황은 쉽게 극복되지 않았다.

또한 아직까지 '자신과 딱 맞는 사람, 진심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지만 앞으로의 결혼 생각도 있기에, 이 이상한 위화감을 해소하지 않으면 직업 장면에서든 연애에서든 문제가 생길까 싶어 대인관계 기술을 배운다고 생각하고 치료장면을 찾았다고 했다.

그러나 어쩐지 첫 면담의 첫마디부터 마무리 멘트까지 치료자를 염두에 둔 듯한 경직된 태도와 너무나 '똑 떨어지는 느낌'에, 이 면담실을 나선 이후의 A 씨의 소진이 걱정이 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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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자존감, 가짜 자존감, 그리고 자신감

낮은 자존감에도 나름의 강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귀히 여기지 않지만요.

그만큼 높은 자존감의 치명적인 단점들도 '높은 자존감의 신화' 때문에 많이 가리어져 있지요.

 

자존감이 높은 경우 좋은 첫인상을 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들의 대인관계의 질이 특별히 높지도 않고, 대인관계를 특별히 오래 유지하는 경향성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그 자기중심적인 모습들로 고립되기 일쑤이고 본인이 세상에 대한 통제감이 높다고 믿기에,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하는 생각으로 음주나 흡연 등 건강에 문제가 되는 행동을 일찍 실행하고 쉽게 여깁니다.

(제가 그렇게 믿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연구결과들로 충분히 입증된 내용들입니다!)

 

반면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와 피드백에 꽤나 예민하고, 항상 본인이 어떤 보일까 하는 염려로 큰 실수가 적습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에 비해, 성취의 측면에서건 성격적 측면에서건 언제나 뭔가 모자라다는 생각으로 자기발전을 위해 부단히 주의를 기울이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자존감을 강조하는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있습니다.

이는, 자존감 중 일부 특성을 과잉일반화하여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연구 결과를 오도하거나, 혹은 극단적으로 높은/낮은 자존감만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럭저럭 낮았다 높았다 부침을 보이는 자잘한 자존감의 파형들을 간과해왔기 때문이지요.

낮은 자존감과 관련된 부정적인 측면, 분명히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글들에도 이런 이야기는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안심시키는 이야기를 좀 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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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쉬고 있을 때 뇌는 어떤 패턴을 보이는가에 대한 연구가 B. Biswal의 학위논문 중 일부로 발표되었을 당시, 이것이 그 이후 뇌인지과학 분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지에 대해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쉬고 있을 때의 뇌의 기능적 상태를 자기공명영상(MRI) 스캐너로 살펴 뇌의 휴지기 연결성(resting-state functional connectivity)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정리한 1995년의 논문의 경우, 다른 학자들이 자신들의 논문에서 인용한 피인용횟수가 (2018년 현재) 6천여 건에 달합니다.

정상군부터 정신증, 기분장애, 알츠하이머형 치매 및 자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집단을 대상으로 휴지기의 뇌 연결성 연구가 진행되었지요.

Biswal은 그 이후 Brain Connectivity라는 학술지를 창간하기도 했고요.

 

신기하게도 뇌는 잠시도 쉬고 있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눈만 감고 있어도 뇌 내에서는 다양한 연결성 패턴들이 관찰됩니다.

그중 특별히 '깨어있으면서 아무 일 없이 쉬고 있음'과 관련된 네트워크를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라고 이름 붙인 A default mode of brain function이라는 ME Raichle의 논문 역시 현재까지의 피인용횟수가 9천 번에 가까워지는 중입니다.

 

2010년, Brain이라는 학술지에 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를 매우 흥미로운 관점에서 해석한 논문이 한 편 게재됩니다.

Freud 선생의 Ego를 뇌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이 휴지기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라는 것입니다.

 

실은, 사람들이 가만히 쉬고 있을 때에 활성화된다는 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자의식, 자기개념과 같은 자기참조적(self-referential) 정보 처리 영역과 겹치며, 타인의 마음이 이럴 것이라 짐작하는(mentalisation /theory of mind) 사회적 상호작용 처리 영역과도 겹친다는 수많은 연구결과가 누적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누워있을 때조차, 자기와 타인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는 뇌 영역만큼은 좀처럼 쉬게 하질 못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돌아보고 상황을 예측하도록 준비하고, 쾌락이나 흥분과 관련한 피질하부의 네트워킹은 조용히 억제하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에 대한 이야기를 가만히 읽다 보면, 자아(Ego)가 하는 일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환경적 압력과 실제 여건을 고려한 현실원칙에 기반해 합리적 선택을 하려는 자아.

쾌락 원칙에 기반한 원초아(Id)를 통제하고 긴장상태를 감소시키려 동기화된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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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보이는 사람인지에 대한 처리를 하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의 영역들은 현재의 연구자들에게는 꼭 Freud 선생의 Ego의 물화(物化)로 비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또 바뀔지 모르겠지만) 최근 뇌과학 연구에 있어 가장 빈번히 언급되는 학자의 이름이 Freud 가 되었지요.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우리들 대부분은, 세상에 예민하고, 본인이 보여지는 측면에 늘 관심을 기울이는 자존감이 불안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밖에서 보이는 나의 모습은 상당한 자신감에 차있는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설령 가짜의 자존감이고 껍데기뿐인 자신감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타인을 도울 수 있고,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누군가에게 그럴듯한 모델이 되는 사람이기를 바라지요.

 

그런데 이런 노력들이 실은 우리가 현실세계 바깥으로 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아 주는 자기의 기능적인 일부인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환경과 나와 타인이, 그리고 나의 의식과 전의식과 무의식이, 그나마 다 같이 만족하며 지낼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안전망이라는 생각 역시 해야 합니다.

뇌는 조금도 쉬지 않도록 만들어졌고, 나와 타인에 대한 부분이라면 더더욱이 그렇습니다.

그게 맞는 것이고요.

 

다만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실제 사회 및 직업적 기능에까지 문제가 관찰되거나, 혹은 자신의 중요성, 자신의 진심에 너무 과잉한 의미를 부여하고 자의식에 매몰된다면, 그래서 그것이 자신과 타인을 오히려 힘들게 한다면, 그 지점에서는 잠시 멈추고 우리를 괴롭히는 그 생각과 불필요한 신념들을 다시금 재평가해 볼 필요가 있겠지요.

이렇게까지 나와 타인의 의식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왜 좀처럼 나를 '진짜로' 쉬게 두지 않을까.

 

 

* 피인용횟수는 학술논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가장 많은 빈도로 연구가 인용되는 학자는 누구라 생각되나요?

도출하는 연구결과들이 전반적으로 잘 인용되는지에 기반해 학자들의 랭킹을 정리해두는 한 재미있는 사이트(http://www.webometrics.info/en/node/58)에도 나타나있는데, 너무나, 당연하게도, S. Freud 선생입니다. 전체 연구실적물의 총 피인용횟수가 곧 50만회에 이를 예정이고요. (https://scholar.google.co.kr/citations?user=N80kIiYAAAAJ&hl=en)

학자가 아닌 논문 자체의 피인용횟수 랭킹이 궁금하다면, 2014년 Nature지에 게재된, <The top 100 papers>라는 글도 참조해보세요.

1위를 차지한 논문은 무려 30만회 피인용되었군요. 저도 분발해야겠습니다.

 

저자 약력_ 허지원 임상심리전문가, 정신건강임상심리사1급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조교수
대한뇌기능매핑학회 젊은연구자상 수상
한국임상심리학회 특임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보건복지부 정신건강기술개발사업 "CBT기반 어플- 마성의 토닥토닥" 연구 책임자
한국연구재단 뇌과학원천기술개발사업 "정서조절 인공지능 모델 개발 II" 연구 책임자

 

*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해당 글들을 책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저자 : 허지원)
  -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이 무너진 마음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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