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제가 다 부족한 탓입니다”

 

A는 누가 봐도 꽤 매력적인 외모와 사회성을 가지고 있었고 업무 능력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이 능력이 나쁘지 않은 정도였을 뿐, 딱히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탁월한 재주라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재주였는데, 어떤 일에든 '제가 부족해서 그렇지요', '제가 너무 몰랐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심리치료 중에도 같은 일은 반복되어, A에게 여러 유사한 사건들에 대해 명료화나 해석을 해주려 하면, '그때엔 제가 다 부족했었지요. 진짜 제 탓이 맞네요.'하며 과도하게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상담의 흐름이 계속 끊겼고, 더 깊은 수준의 통찰로 이행되기 어려웠다.

 

사실 A가 상담 장면에 온 것은 화를 조절하기 어렵다는 기분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지 후배들과 함께 작업을 할 때면 '아무리 찰떡같이 말을 해도 개떡같이 알아듣는' 후배들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자꾸 정색을 하게 되어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거나, '선배 같지도 않은 선배'와 작업할 때면 그 지시들에 순응을 하지만 시키는 업무 하나하나에 왠지 부아가 치밀어 일을 더 비효율적으로 처리하다 여러 차례 주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쯤 되니 동료들은 '저 때문에 불편을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따위의 내용이 담긴 A의 문자 메시지가 달갑지 않았다.

A의 표면적인 자존감은 바닥을 내리찍고 있었고 모든 것을 자신의 부족함을 돌리고는 있었으나, 사람들은 이제 A가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뭐가 그렇게 맨날 미안하고 송구하다는 것인지.

같이 있기에 편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진_픽셀

 

먼저 자신의 자존감(self-esteem)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잠시 생각해봅시다. 그럭저럭 괜찮은 편인가요? 너무 낮나요, 혹은 너무나 높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자존감을 낮다고 평가합니다.

이 경우 밖으로 보이는 행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먼저 자존감이 낮아 사회적으로 위축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타인의존적이기에 매사 자신의 평판에 노심초사합니다. 본인은 센티멘털이라 말하고 싶겠지만, 정확히는 정서적 불안정성이 두드러져 금세 마음이 이리저리 휘청대고 안절부절못합니다.

본인은 착한 아이 증후군이라 말하고 싶겠지만 짐짓 괜찮은 척하기 위해, 본인의 생존을 위해, 타인에게는 지극히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가혹한 것이 버릇이 되었습니다.

이 길의 끝에 뭐가 있냐면, 본인의 능력보다 훨씬 더 낮은 성취 수준이 있지요.

결정적인 성취 순간에 갑자기 엉뚱한 행동을 하여 성공을 회피하거나 일을 지연시키는 등의 모습을 보입니다.

본인이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혹은 본인이 너무 잘하는 경우 사람들의 비난을 받거나 누가 상처받을까 걱정되어,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어딘가 아프거나,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포기하거나, 뭔가 아닌 것 같다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그만둡니다.

문득 뒤돌아보면, 왜 어릴 적 내가 생각했던 그 자리가 아닌 곳에 서 있는지 마음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반대로 낮은 자존감을 과잉보상하는 전략을 택한 경우에는 오만하고 거만한 태도로 거드름을 피웁니다. 자기과시적이고, 그 어떤 결점도 보이지 않으려는 완벽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동시에 타인의 결점에 발끈하여 불같이 화를 내거나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본인의 영향력과 능력을 과시하려는 듯 타인을 과도하게 비난합니다.

자존감에 위협이 되는 모든 자극에 대해 선제적인 공격을 시도하다 보니 곁에 있는 사람들이 매우 당황해하고요. '발끈'의 또 다른 동의어는 '낮은 자존감'인 것이죠.

사진_픽셀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 답한 사람들도 있겠죠. 어릴 때에는 조금 위축되는 측면도 있고 딴엔 심각한 대인관계 문제도 있었으나 지금은 타인에게 기꺼이 관대하며, 본인의 여러 측면에 대해 자신감에 차 있다고 자평하는 사람들.

그런데 A의 경우를 보자면, A의 자존감은 높은 것일까요, 낮은 것일까요? 높은/낮은 자존감이 아닌 외현적/내현적 자존감의 분류로 A의 자존감을 다시 들여다봅시다.

 

자존감은 크게는 외현적 자존감과 내현적 자존감으로 나뉩니다.

- 외현적 자존감(explicit self-esteem) : 의도적인, 통제 가능한 명시적 자존감

- 내현적 자존감(implicit self-esteem) : 자동적인, 통제 불가한 암묵적 자존감

외현적 자존감의 경우, (자기 딴에는) 합리적이고 의식적인 수준에서의 자기 평가에 기반합니다. "나는 그래도 이런 배경을 가지고 이런 성취를 하고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 외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하는 식의 자기 평가죠.

 

반면에 내현적 자존감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며, 보통의 내현적 자존감 연구는 다음의 특징에 초점을 맞추어 이루어집니다.

- 전의식적인 자존감 : 평소에는 잊고 있지만 무의식 수준으로 억압한 것은 아니어서, 질문이나 단서가 있으면 회상하여 의식 위로 떠올릴 수 있는 사고들. (예: 초등학교 때의 일을 묻는 질문에, "아.. 그러고 보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 자동적이며 연합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처리가 되어 버리는 자존감 : 너무나 몸과 마음에 익숙해져 버려, 통제할 필요나 기회도 없이 자동적인 수준에서 작동하는 자판기 같은 자존감. (예: 과거와 유사한 상황에서는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부정적인 자기인식. "아.. 맞다. 내가 그렇지 뭐..")

- 비언어적인, 빠른 자존감 : 말로 설명하기에는 어렵지만, '왠지 모르게 그냥 그런' 자기에 대한 생각과 이미지. 사람-나무-집 그림검사와 같은 투사 검사에서 드러나는 자존감의 단편들.

- 정서와 긴밀히 연결된 자존감 : 자부심, 죄책감, 모멸감, 수치심, 시기심 등 문득문득 치받혀 올라오는 자의식 정서와 관련한 자기평가.

 

이렇게 이 두 가지 자존감은 감정, 사고, 기억, 행동 등 다양한 측면에서 변별됩니다.

긍정적인 수준의 외현적 자존감은 특히 배내측 전전두 피질(dorsomedial prefrontal cortex)과 편도체(amygdala)가 더 관여해야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까지의 연구들에 따르면 내/외현적 자존감은 전반적으로 유사한 영역이 담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내측 전전두 피질, 설전부/후측 대상피질, 복내측 전전두 피질, 복측 선조체, 슬하 전측대상 피질 등이 이 두 가지 유형의 자존감을 다루고 있는 영역들이지요.

사진_픽사베이

다만 현재까지 내/외현적 자존감 관련 뇌 영역이 유사하다는 결과는 대부분 임상증상이 없는 정상군을 대상으로 한 연구들에서 도출된 것입니다.

자존감의 저하를 보이는 임상군을 대상으로 한 최근의 뇌영상 연구들은 조금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고요.

예를 들어, 부정적이며 우울한 단서에 대한 우울 환자의 뇌기능 패턴을 밝힌 2015년의 연구에서는 우울 환자 특유의 신경 활동이 외현적 자기 관련 정보처리 및 암묵적 처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살폈습니다.

 

이 연구는 두 가지 측면에서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는데, 먼저 만성 우울 환자가 우울한 단어를 처리할 때 자존감의 허브(hub)인 내측 전전두 피질이 과활성화될 것이라는 일반적 예측과는 달리, 이 자존감 영역의 활동성이 현저히 저하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정서적으로 둔감해진 반응으로, 이미 오랫동안 우울에 침잠해있는 과정에서 부정적 자극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임상 증상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나는 못났고, 게으르고, 재능이 없으며, 유머가 없고, 매력적이지 않다-.'

이미 오랫동안 자신의 참담한 특성에 대해 매우 자의적인 증거들을 견고하게 쌓아 올린 이들에게는 이런 부정적인 정보들이 새삼스럽지 않은 것이죠.

 

두 번째로 흥미로운 부분이 외현적 자기 관련 정보처리에 대한 부분인데, 이때의 저하된 뇌 반응성 패턴이 내현적 처리 패턴과는 별다른 관련을 보이지 않고 외현적 처리와만 상관을 보였습니다.

특히 자신에 대한 암묵적인 태도를 실험장면에서 측정하기란 상당히 까다로워, 우울한 이들의 내현적인 자존감에 대한 뇌신경학적 기반은 여전히 묘연한 상태입니다.

앞으로 더 세련된 연구들이 다수 수행되어 이를 지지 혹은 반증하는 후속 결과들이 다양하게 도출될 필요가 있겠습니다.

연구에 흥미 있어 이 어려운 내용들을 읽고 또 읽는 당신이 새로운 연구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도 있겠고요.

 

결국 A 씨와 같은 자존감 문제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은 단순히 자존감의 높낮음을 파악해서 될 일은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는 엉망인 자존감을 드러낼지 언정, 속으로는 한껏 높은 자기가치감 때문에 타인에 대한 분노감이 높아져 있을지 모를 일이며, 이들 뇌에서 일어나는 내현적 처리는 전반적인 자존감이 모두 저하된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게 작동되고 있으니까요.

 

 

저자 약력_ 허지원 임상심리전문가, 정신건강임상심리사1급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조교수
대한뇌기능매핑학회 젊은연구자상 수상
한국임상심리학회 특임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보건복지부 정신건강기술개발사업 "CBT기반 어플- 마성의 토닥토닥" 연구 책임자
한국연구재단 뇌과학원천기술개발사업 "정서조절 인공지능 모델 개발 II" 연구 책임자

 

*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해당 글들을 책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저자 : 허지원)
  -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이 무너진 마음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