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허지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저를 포함해 우리 모두, 자신의 자존감은 상당히 낮다고 생각합니다.

지각된 낮은 자존감은 우울증과 같은 기분장애, 강박장애와 불안장애, 자살사고와 시도, 역기능적인 사회적 기술, 빈약한 성취욕구, 혹은 반대로 극단적인 성취지향성 등에 기여하는 것으로도 밝혀졌지요.

어떻게 해야 이 '자존감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우리의 주양육자들은 심리학 교과서처럼 우리를 돌보지는 못했습니다. 주양육자가 짜증에 치받혀 감정적으로 반응할 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 화를 받아내야 했고, 혹은 주양육자가 본인 삶의 지나친 무게로 우울한 삶을 이어가고 있을 때 나는 방치되어야 했지요.

그러나 나를 출산했을 당시 부모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그들이 얼마나 어렸고 얼마나 미숙하게 우리를 통제하려 했는지, 나이가 들수록 차차 알게 됩니다. 우리를 낳았을 그 때의 부모보다 우리가 더 나이가 많아지는 어느 순간도 분명 오겠지요.

안타깝게도 우리의 부모는 따뜻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거나, 어린 나이에 사회적 압력으로 결혼했거나, 본인의 성별 정체성 및 성 지향성을 몰랐거나, 결혼 및 출산을 원하지 않았거나, 성취와 관련한 자신의 진짜 욕구를 몰랐거나, 하여튼 자신을 너무 몰랐고, 너무나 미성숙했습니다. 시대가 그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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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육자의 능동/수동적 공격적 태도에 만성적으로 노출되어 자기파괴적 사고와 감정들로 힘겨운 분에게, 이런 주양육자의 사정을 살펴서 용서해보자는 허울만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거리를 두어 그때의 상황을 건조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양육자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엉망진창으로 엉키고 오염된 감정을 그럭저럭 처리해 돌려보낼 수가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부당한 취급을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그런 상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이것은 내게서 기인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형편없이 미성숙했다.'

즉, 미성숙한 주양육자는 너무나 어렸던 우리를 돌볼 수 없었고, 우리의 자존감을 지속적으로 높여주는데 '그들이' 실패를 한 것입니다. 참 아쉽지요. 주양육자가 우리를 좀 더 잘 보살폈다면, 내 행동을 바꾸려는 어떤 의도도 없이 그저 눈만 마주쳐도 '그냥 너 자체로 좋아'란 웃음으로 나를 바라봐왔다면, 우리의 자존감은 꽤 안정적으로 높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패가 꼭 나의 실패로 꼭 이어져야 할까요?

 

개인의 오래된 과거력으로 자존감이 높아질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분들에 한하여,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을 권유하고자 합니다.

첫째, 일단 원가족과 엉겨서 분노 폭발을 하는 것은 어떤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최근의 연구들은 분노는 표현하면 할수록 화가 납니다. 아무 소득도 방향도 없는 정서 표현을 왜 계속하고 있나요. 그렇게 해서 분이 풀릴 것 같으면 하지 말라고는 못 하겠는데, 안 풀립니다.

일단은 원가족과 분리되어야 하며, 특히 주양육자로부터 가치판단을 배제한 무조건적인 지지와 수용을 받지 못했던 것이 본인의 낮은 자존감 형성에 기여했다면, 이런 경험을 안정적으로 제공하여 재양육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나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도모하는 것이 한 가지 방법입니다.

이 때의 좋은 사람, 즉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해주는 이는 애인이 될 수도 있겠고 상담가가 될 수도 있으며,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상대의 호의적인 이야기에 자꾸 의도를 파악하려 하거나 딴지 걸지 말아요. 자신만 못 보는, 혹은 보기를 두려워하는 자신의 장점을, 상대는 보고 있는 거예요. 이 부분은 앞으로의 글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이야기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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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앞으로는 자존감이 높은 척 행동하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높거나 자기 가치감이 과대한 것과 달리, '자존감 높은 사람들이 할 법한 행동'이 몸에 스며들도록 매일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들을 일일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드러내지 않기, 중립적인 이야기에 과잉방어하지 않는 ‘척'하기, 불편한 상황에서 유머를 사용하며 적절히 자기주장하는 ‘척'하기, 혼자 밥을 먹거나 홀로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척'하기, 실패 가능성 혹은 주위의 평판에 초연한 ‘척'하기.

이런 '척(pretending)'은 어느 순간 여러분에게 신뢰롭고 효과적인 가면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특히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기를, 밖에서 보여지는 자기와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 너무나 달라 자신이 가식적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괴롭힙니다.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이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사용하던 가면인 페르소나(Persona)를 심리학적 의미로 차용했을 때, 이는 부정적인 뜻은 아니었습니다. 융에 따르면 사람들은 사회적 압력에 적응적으로 반응하기 위해 누구나 천 개의 가면을 가지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가지고 사회적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런 페르소나와 관련한 억압, 고립감, 혹은 팽창이 병리적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가면은 다양할수록 좋습니다.

당연히 집에서 혼자 있을 때의 자신과, 친한 지인들과 있을 때의 자신과, 사회생활을 할 때의 자신은 달라야 합니다. 집에서의 성격과 똑같은 모습으로 처음 참석한 모임에 앉아있다면, 그것이 병리적인 상태입니다.

당신이 친구1을 친구2에게 처음 소개했는데, 친구1이 자신은 거짓자기를 보이기 싫다며 집에서 하는 태도 그대로 표출하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친구1의 무례에 큰 당혹감을 경험할 것입니다.

진짜 자기와 타인에게 보이는 자기가 똑같아야 한다는 병리적인 믿음에 몰두하는 이유는, 자신의 측면 중 타인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부분이 있음을 과잉지각하고 혼자서만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괜찮아요. 지각된 자존감이 낮다는 사실은, 웬만하면 자기와 치료자만 알면 족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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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면, 자존감 높아 보이는 가면 하나쯤 가지고 있어도 되고, 타인에게 친절하고 사회성 좋아 보이는 가면도 있어도 됩니다. 이를 적절한 때에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 좋은 심리적 기능의 반영입니다.

성격(personality)이라는 단어가 페르소나에서 기원했듯, 우리의 성격은 다차원적이고 복잡합니다. 꽤나 사교적이지만, 동시에 혼자 있는 것을 가장 좋아할 수 있고, 타인에게 공감을 잘 하지만, 누구보다 타인을 신랄하게 비판할 수도 있는 게 사람입니다.

무리 없이 상황에 맞게만 쓴다면 그런 가면, 얼마든지 가져도 돼요. 낮은 자존감에서 오는 가식이 아니라, 타인의 비위를 맞추려는 위선이 아니라, 기능(function)이고 기술(skill)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숙제는 이렇습니다.

실제로 당신의 자존감이 일관되게 낮은 편인지 vs 어떤 경우에는 높아지기도 하는 편인지 vs 생각해보니 그럭저럭 괜찮은지, 사례를 들어 평가해 볼 것.

그러한 당신의 자존감에 영향을 미친 원가족, 주양육자의 특성을 파악할 것.

어떤 가면이 본인의 자존감 유지에 실제로 기능적인지, 혹은 아직 적절한 가면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면 어떤 장면에서 연습을 해야 무리가 없을지 목록을 작성할 것.

그리고 우리의 너무나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우리의 자존감과 성격을 고려해서, 대부분은 아무리 우리가 우리의 자존감을 낮게 평가한다 하더라도, 가끔씩은 '오, 오늘은 나 좀 괜찮았어'하며 기분 좋은 자존감 상승을 경험하며 이 성장의 순간들을 기억해 둘 것.

 

우리는 매일 조금씩 더 괜찮은 사람이 될 거예요. 

 

 

저자 약력_ 허지원 임상심리전문가, 정신건강임상심리사1급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조교수
대한뇌기능매핑학회 젊은연구자상 수상
한국임상심리학회 특임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보건복지부 정신건강기술개발사업 "CBT기반 어플- 마성의 토닥토닥" 연구 책임자
한국연구재단 뇌과학원천기술개발사업 "정서조절 인공지능 모델 개발 II" 연구 책임자

 

*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해당 글들을 책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저자 : 허지원)
  -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이 무너진 마음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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