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아침 9시에 만나서 밤 10시에 헤어질 때까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사진_픽셀

 

조현병 환자로서의 고민

 

조현병 환자로 살다 보면 현실적 어려움에 부딪힌다. 학업과 취업은 물론 건강문제까지 쉬운 것이 없다. 그중에서도 결혼 문제는 가장 큰 고민이 된다. 나도 생각이 많았다. 만약 조현병 환자가 결혼까지 생각하는 상대를 만난다면, 서로 신뢰가 쌓일 때쯤 병을 고백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첫 만남부터 아팠던 얘기를 하면 아무리 이해심이 많은 상대도 당황할 것이다. 반대로 평생 숨길 수도 없다. 매일 밤 몰래 약을 먹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난 조금 특수한 경우다. 책을 통해 내 병을 알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는 건 아니다. 내 모든 이야기를 알고도 사랑으로 포용해주는 사람이라면 평생을 행복하게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연애할 수 없던 20대

 

대학 시절 동아리 생활은 많은 기쁨을 주었다. 하지만 한 가지 힘든 전통이 있었다. 바로 연애 금지다. 그런 환경 속에서 대학 시절에 여자 친구가 있을 수 없었다. 이후 엄격한 규율의 동아리 환경이 나와 맞지 않아 대학 졸업 후 탈퇴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20대는 모태 솔로로 지냈다.

 

 

사진_픽셀

 

미국 텍사스에서 온 메일

 

이후로도 연애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그러나 건강 문제와 싸우느라 심적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벌써 30대의 나이가 되었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교회도 좋은 곳으로 옮겼다. 학교생활도 신앙생활도 만족스럽고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 살을 빼기 위해 헬스장을 다녔다. 한 달에 9킬로를 감량하며 비포 애프터(Before&After) 모델로 뽑히기도 했다. 그리고 조현병 환우 대상 수기 공모전에서 대상을 탔다. 이때 썼던 글을 다른 사람들과도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조현병 환우들이 모인 커뮤니티 사이트에 공모전 상을 받은 글을 올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잘 읽었다고 댓글을 달아 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메일 한 통이 왔다. 커뮤니티에 올린 글을 읽고 연락해 온 것이다. 자신을 미국 텍사스주에 사는 중년의 여성이라 소개했다. 자신의 딸이 조현병을 앓고 있어서 한국으로 치료를 보냈는데 친척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병을 잘 극복해 낸 경험을 살려 자신의 딸에게도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다.

 

 

첫 연애의 시작

 

마침 딸이 머무는 이모네 집이 내가 사는 동네와 가까웠다. 일단 연락처를 받아 만나기로 했다. 나보다 네 살 어린 자매였다. 목소리 톤이 조금 높은 거 말고는 전혀 이상한 모습이 없었다. 다만 너무 순수하고 착해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부족할 뿐이었다. 당시 방학이라 시간이 넉넉한 편이었고 자매도 집에 있는 것 말고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우리는 매일 같이 만났고 아침 9시에 만나 밤 10시에 헤어질 때까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몇 주 뒤 서로 카톡으로 대화하던 중 자매가 뜬금없는 문자를 보냈다. 갑자기 결혼하자는 것이었다. 난 당황했지만 일단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레스토랑에 가서 자매의 두 손을 잡고 말했다. ‘오늘부터 우리 사귀는 거라고!’ 그렇게 나의 첫 연애는 시작되었다. 이후 만날 때마다 함께 웨딩 성경을 읽었다. 나는 말씀을 가르쳐 주었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나와 여자 친구는 몸이 다소 통통한 편이었다. 서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나는 헬스장을 다녔고, 여자 친구는 단식원에 들어가기도 했다. 약 때문인지 다 살이 잘 빠지지는 않았지만 헤어질 때마다 포옹의 인사를 나누었다.

 

사진_픽사베이

 

 

과잉보호 속에 살아온 여자 친구

 

그리고 미국에 계시는 여자 친구의 부모님께 교제 사실을 알렸다. 그 후로 여자 친구의 어머님과 카톡으로 이틀에 한 번씩 장문의 글을 주고받았다. 사귀기 전에도 여자 친구의 상태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기는 했다. 그러다 통화로까지 이어졌다. 내게 너무 자주 연락을 해오셨다. 한편 여자 친구도 나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어머님에게 알리고 있었다. 데이트하며 만난 시간과 먹었던 것, 심지어 이동 동선까지도 알고 계셨다. 나의 페이스북 계정도 어떻게 알아냈는지 미국에 있는 여자 친구의 언니가 친구 신청을 걸어왔다. 나도 기자 생활을 하며 이단 사이비 종교를 심층 조사해 온 경험이 있다. 카카오 스토리와 페이스북을 통해 최대한 정보를 모았다. 그리고 여자 친구와 많은 대화를 하며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여자 친구가 유치원생일 때 온 가족이 이민을 갔다. 부부는 열심히 도넛 가게를 운영했다. 자녀들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여자 친구는 중학교 때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계기로 어머님의 과잉보호가 시작됐다. 학교까지 차로 데려다주는 건 물론, 옷 입는 것, 물건 정리까지 모두 대신해 주었다.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까지 여자 친구는 원하는 옷을 입거나 물건을 정리하지 못했다. 게다가 어머님은 외출 시 잠근 문고리를 몇 번이고 재확인하는 강박증까지 있었다.

여자 친구는 나빠진 눈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치료 기간 동안 한국의 이모, 할머니가 같이 사는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모와 할머니도 어머님처럼 과잉보호를 했다. 결국 차를 몰고 도망치듯 서울에서 경기도 남부까지 내려왔다. 고시원을 잡고 아르바이트 일자리까지 구했다. 그러나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어머님도 한국에 왔다. 흥신소를 통해 딸을 찾아냈고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정신병원 의사는 여자 친구를 조현병으로 판정했다. 이후 두 달의 병원 생활 끝에 다시 할머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병에 대한 강박증

 

미국으로 돌아간 어머님은 딸이 겪는 조현병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다 조현병 관련 커뮤니티 사이트까지 가입했다. 커뮤니티의 운영자는 범상한 정신과 의사였다. 어머님은 매일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정보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프린트로 인쇄할 정도로 의사와 커뮤니티를 신뢰했다. 자신의 딸도 그 의사에게 치료받게 했다. 그러다 내가 올린 글을 발견했고 딸에게까지 연결해 준 것이다. 나는 그 의사를 정말 신뢰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만약 정말 능력이 출중하다면 나도 다니던 병원을 그만두고 그 의사에게 치료를 맡기려 했다. 그렇게 병원을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내가 입을 열어 인사를 한 지 5초 만에 의사는 확신했다. "말하는 게 어눌한 걸 보니 조현병 맞네!" 비록 내가 의학적 지식은 없으나, 어쩌면 여자 친구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다니는 병원으로 여자 친구를 데려갔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 의사지만 10년 넘게 내가 신뢰해 온 분이셨다. 여자 친구와의 긴 상담이 끝난 뒤 나를 불러 말씀하셨다. 우리 둘 다 전형적인 조현병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후천적으로 힘든 일을 겪으며 증상이 나타난 것일 수 있다고 추측하셨다. 결코, 섣불리 진단하시지는 않았다.

나는 여자 친구의 어머님에게 병원을 옮기자고 말했다. 그러나 나이가 너무 많은 의사라며 반대하셨다. 여자 친구는 의사마저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었다. 차라리 어서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몸은 20대 후반이었지만 과잉보호 속에서 마음과 생각이 더 이상 자라날 수 없었다. 여자 친구 역시 부모에게서 벗어나길 원했다. 다행인지 사귄 지 두 달도 안 되어 여자 친구의 집안 쪽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물론 우리 가족들은 잠시 당황할 뿐 결혼에 대해서 시큰둥했다. 하지만 나와 여자 친구는 약속했다. 멀리 대구나 대전 같은 지방으로 내려가서 같이 살자고. 하지만 어머님은 함께 미국에 와서 살기를 원했다. 어차피 한국은 살아가기 험하고 조현병에 대한 인식도 나쁘니 미국에 와서 살라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들이 보호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엔 반대하던 여자 친구도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했고, 차라리 내가 미국에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사진_픽사베이

 

허무하게 끝난 첫 연애

 

그러나 나의 사소한 실수로 나와 여자 친구의 어머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하루 12시간씩 매일 만나다 보니 밥 먹고 차 마시고 데이트하는 비용을 혼자서 부담하기 버거웠다. 가끔은 여자 친구에게도 비용을 내라고 했다. 이는 곧 이모와 할머니를 거쳐 어머님의 귀에도 들어갔다. 여자 친구의 온 가족이 난리가 났다. 가족들에게 나는 착하고 완벽한 딸의 남자 친구여야 했다. 그러다 여자 친구의 언니가 한국에 왔다. 셋이 카페에서 만나 차를 마셨다. 그날 여자 친구의 언니가 블루 레모네이드를 시켰는데 나는 잘못 들어 그냥 레모네이드를 줬다. 여자 친구의 언니는 이 사실을 이모에게 말했다. 그러자 이모는 강아지 깽깽이로 무시당한 거라고 언니에게 말했다. 또다시 여자 친구의 집안은 난리가 났다. 얼마 뒤 어머님은 여자 친구를 통해 헤어지라는 말을 전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로 헤어지는 게 이상했다. 그러다 한 가지 사실이 기억났다. 조현병 커뮤니티의 의사가 올린 글이다. 조현병 환자들도 결혼해서 얼마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조현병 환자들끼리는 결혼하면 안 된다고 했다. 자식에게 유전될 가능성이 40%라는 이유다. 하지만 난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나 여자 친구나 조현병이 유전으로 생긴 건 아니라 생각했다. 게다가 40%라는 의학적 근거도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 친구의 어머님은 그 글을 보고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빵집에서 몰래 만났다. 여자 친구는 밥보다 빵이 좋다며 ‘내가 왜 한국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가고 싶어 했다. 며칠 뒤 여자 친구는 진짜 미국으로 돌아가 있었다. 미국에서 짧은 작별 메일이 온 것이다. 하도 시달려서인지, 나 역시 짧고 간단한 답장을 보냈다. 그리곤 훌훌 털어 버렸다. 슬프거나 아쉬운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첫 연애는 끝이 났다.

 

 

* 정신의학신문은 특정 종교와 무관한 언론사입니다. 옥탑방 글쟁이님의 글을 통해 조현병에 대해 잘못된 인식이 바뀌기를 기대합니다.

* 정신의학신문에서 독자기고 칼럼을 게재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정신의학신문 홈페이지 - 게시판 -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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