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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고민을 항상 들어주는 나 - 착한사람 콤플렉스?
손정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18.03.14 00:01

[정신의학신문 : 손정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J씨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20대 초반 대학생입니다. 방송을 듣다보니 제 문제도 궁금해져서 사연 보내봅니다.

 

다름 아니라 인간관계 문제 때문인데요, 예전부터 지금까지 제 주변에 우울하거나 정신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느껴지는 게 문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는 처음에는 조금 내성적이어도 막상 친구들과 친해지고나면 활발하게 사교활동을 하는 편입니다. 문제는 조금만 친해졌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이 고민거리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해서 제가 감당하기 힘들다고 느껴지는 점입니다.

저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많이 걸리는 편이라 보통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에도 몇 달은 함께 지내야 익숙해지는데, 제가 익숙해 지기도 전에 사람들은 제게 진지한 고민을 털어놓고 공감해주거나 자신이 힘든 걸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들도 제게 엄청난 해결책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제가 듣는데 정신력 소모가 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을 사귈 때 일부러 그런 사람들을 골라서 사귀는 것도 아닌데, 이런 이유로 매번 마지막이 별로 좋게 끝나질 못하니 이제는 이게 제 성격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너무 쉽게 들어주니 몰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제는 새로 사람 사귀는 걸 좀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찾아오면 또 사람들을 사귀게 되고 다시 심적으로 피로해집니다.

 

제가 힘들고 지칠 때에도 하나씩 전화가 걸려와 '이게 힘들다, 저게 힘들다' 하는 걸 들어주게 되니 이대로 가다간 제가 더 우울해질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사연 없는 사람 없겠지만 친구 다섯을 사귀면 그 중 하나는 꼭 가족으로부터 학대를 받고 있다, 죽어버릴 거다, 심하게 우울하다 혹은 내 성적 취향이 남과 달라서 고민이 많다는 얘기를 제게 해옵니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닌 것 같아 상담선생님을 찾아보라고 하기도 하고 또 관련 책을 찾아 읽으면서라도 도움을 주려고 해보지만 사실 제가 무슨 말을 해준다고 듣는 것 같지도 않고 그냥 감정 쓰레기통 역할만 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사진_픽셀

 

사정이 이렇다보니 그런 친구들이 다시 전화가 올때마다 덜컥 겁이나서 피하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너도 똑같다, 너도 날 버릴 거고 싫어한다'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멀어지곤 하고요. 사실 처음에는 도움을 주려다가도 언제까지나 힘들다는 말만 반복하니 저도 질려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이번에 대학에 새로 들어와서도 엠티, 새터, 학과활동 같은 건 전혀 안하고 동아리활동만 하는데도 적응에 어려워하는 친구에게 얼마 전 울면서 전화가 오고 죽어버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안쓰럽기도 했지만 몇 번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꾸 듣다보니 왜 꼭 나여야 하냐는 의문과 함께 화가 났습니다. 제 일이 심리상담사도 아니고 의사도 아닌데 단지 어떤 사람을 사귄 것만으로 너무 많은 의무를 짊어지게 된 것 같아 답답하고 또 '친구로서 이 정도도 못해주면 어쩌나, 쟤한텐 내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하는 생각도 들어 굉장히 복잡한 기분이 듭니다. 자꾸 저에게 상담을 요청해오는 친구들. 어떻게 해야할까요?

 

 

뇌부자들의 답장

 

안녕하세요, 뇌부자들 입니다.

주위에 본인들의 고민과 괴로운 감정을 털어놓고 이해받기 바라는 이들이 많아서, 원치 않을 때에도 늘 받아줘야 하는 상황에 지치고 힘드신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아마 가까운 분들에게 이런 상황을 털어놓아도 대개 '고민 상담을 많이 해주게 되는 건 네 성격이 좋기 때문 아니겠니'라는 반응일거라, 지금의 힘든 상황을 이해받기 어렵지 않았을까 싶어요.

 

먼저 살펴볼 것은, 괴로운 마음을 털어놓고 의지하던 친구들이 J씨가 조금만 지치고 힘들어하는 기색(연락을 피한다거나)을 보이면 '너도 똑같다, 날 싫어해 버릴 거다'라고 비난하고 멀어지는 게 반복됐다는 점에요. J씨가 그들에게 정말 큰 잘못을 하거나 모질게 대한 게 아니라면, 그 분들의 그런 모습은 ‘이상화와 평가절하(idealization& devaluation)’라고 하는, 일종의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대인관계에서의 패턴인 게 아닐까 추측이 됩니다. 충분한 판단 없이 섣불리 상대방을 본인의 환상 속 이상적인 대상으로 인식하고 대접하면서 그런 모습을 기대하다가, 그 기대가 조금이라도 좌절되면 별안간 그 상대를 심하게 폄하해 화를 내고 떠나버리기도 하는 반응이죠. 이런 성향이 있는 분들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아무래도 대인관계에서 뭔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가능성이 높을 거고요. 그렇지만 그 분들의 성향이나 상황이 어쨌건, 고민을 들어주고 힘든 감정을 받아주던 J씨 입장에서 그런 비난을 대하게 되면 당황스럽고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이 당연하겠죠.

 

그렇다면 J씨가 일부러 그런 사람들을 골라 사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이들이 유독 많이 다가와서 결국 좋지 못하게 관계가 끝나게 되는걸까요? 우울한 얘기를 듣다가 같이 우울해지고 고민을 듣는 데 정신력 소모가 심하다는 메일 내용에서 기본적으로 J씨는 공감 능력이 뛰어난 분이라고 추측이 됩니다. 공감(共感), 타인의 상황에서 느낄법한 감정을 헤아리고 떠올리는 능력은 누구나 의식적으로 키우고 조절이 가능한 부분도 있지만, 타고난 성향 및 이것이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결정화되는 과정의 영향이 큽니다.

사실 누군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나 측은해서 돕고 싶은 마음과 부담감, 두 가지 모두를 느낄 겁니다. 다만 J씨는 전자의 마음을 더 크게 느끼는 성향이며, 그것이 대화할 때의 표정과 말투, 태도 등 겉모습 전반에 배어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관계에서의 어려움과 실패를 반복해왔던 친구들은 이런 J씨의 모습에서 전에 없이 이해받는 느낌, 안전하고 수용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받기가 쉬울 거예요.

 

사진_픽사베이

 

다른 한편으로는 J씨가 의식하지 못한 채로 '난 늘 수용적이고 지지적인 모습을 주변 사람 모두에게 보여야 돼'라는 의무감과 부담이 강한 성향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이 도덕적인지, 규범을 벗어나는 건 아닌지를 감시하는 초자아(superego)가 강하다고 볼 수도 있고요. 어려움에 처해 힘든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면 유달리 적극적으로 구해 주고자하는 성향을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구원환상(rescue fantasy)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일종의 자기애적 행동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저 ‘착한 사람 컴플렉스’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앞서 말한 어릴 적의 양육 관계와 스타일, 초기 경험을 통해 형성된 성격 특성으로 볼 수 있는거죠.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앞서 말한 다소 의존적인 성격의 친구들과 j씨 성격 성향 사이의 ‘궁합’(긍정적이지 못한 쪽으로의)이 들어 맞아 지금의 어려움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고요.

 

어떤 패턴이든 성격 성향으로 인한 문제라면, 그 변화를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과 연구가 필요합니다. 만약 무작정 일부러 냉정한 표정과 태도를 보이면서 지낸다면 당장은 그런 일이 줄어들긴 하겠지만, 결국 아마 지금보다도 J님의 마음이 더 불편하고 힘들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간단하고 단기적으로는 J씨 본인이 감내하면서 지낼 수 있는 ‘고민 상담’의 빈도, 수위를 구체적으로 정해서(일주일에 2번, 15분 이내로 들어주기 등) 그걸 지키기 위한 시도를 해보세요. 혹시 이런 사정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비난하는 친구라면, 지금과 같은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게 과연 서로를 위해 바람직할지 생각해보시기 바라고요.

또 좀 더 근본적으로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반복되게 됐는지’ 내 마음 속 원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변화를 모색해 보기 위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분석적 면담이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어릴 때의 초기 경험부터 지금까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로 이 ‘패턴’에 영향을 미쳐 온 기억과 감정들에 대해 살펴보다 보면 조금씩 변화가 시작될테니까, 한 번 고려해 보시길 바랄게요.

 

사실, J씨의 공감 능력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나 심리 상담사에게만 필요한 미덕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적인 관계나 직업적 상황 모두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관계에 엮이면서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공감 성향은 강력한 장점이자 개인적 매력의 원천이 됩니다. 그 정도가 지나치면 나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알맞게 다듬고 조절할 수 있다면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게 해줄 ‘축복’이라는 점을 마지막으로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부디 J씨가 건강한 공감 능력으로 본인과 주위 사람 모두에게 행복을 주면서 지내실 수 있기를 바랄게요. 소중한 사연 감사합니다.

 

뇌부자들 드림.

 

[뇌부자들을 팟캐스트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아이폰 Podcast : https://itun.es/kr/XJaKib.c

팟빵 : http://www.podbbang.com/ch/13552

팟티 : http://m.podty.me/pod/SC1758


 

손정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brainrich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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