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러분은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으시나요? 혹은 그런 황홀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어떤 분들은 운명적인 상대를 만난다는 것이, ‘첫눈에 반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생각하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외적인 이상형에 이끌리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반면,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는데요, 이런 분들은 잠시 잠깐 사이에 누군가의 겉모습만 보고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나름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이렇게 처음 본 남녀가 상대를 이상화하며 마치 남성에게 여성은 신비로운 여신처럼, 그리고 여성에게 남성은 그녀의 구원자이자 영웅처럼 느껴지는 상태를 카를 융(Carl G. Jung)은 남자는 여자에게 아니마(Anima)를, 여자는 남자에게 아니무스(Animus)를 투사하는 행위로 해석했습니다. 여기서 아니마란, 남자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여성성을, 아니무스란 여자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남성성을 뜻합니다. 

남성 속의 여성성, 그리고 여성 속의 남성성이란 말이 언뜻 듣기에는 굉장히 낯선 개념으로 다가오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인간의 무의식을 구성하는 수많은 원형 중에 이런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원형을 처음 발견하고 또 학문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이자 분석심리학의 개척자인 카를 융입니다. 융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수제자라 불릴 정도로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으며 프로이트와 함께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큰 줄기를 만든 학자로 평가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무의식에 억압된 기억이나 경험이 현실에서 심리적인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프로이트와 달리, 인간 무의식의 심층에는 선행 인류로부터 전해지는 원시적 이미지로 구성된 ‘집단무의식’이 있다고 보았지요. 즉, 조상으로부터 후손에게로 전달되는 정신적 유전자처럼 이미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정신 속에 축적되어 있는 무의식이 있는데, 이를 ‘원형(Archetypes)’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의식을 구성하는 여러 원형 중에서도 남자의 무의식에는 여성성의 원형이, 여자의 무의식에는 남성성의 원형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각각을 ‘아니마’와 ‘아니무스’라고 부르게 되죠.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생물학적인 성(性)에 더해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성적 역할에 충실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면서, 남성은 자기 안에 존재하는 여성성을, 그리고 여성은 자기 안에 존재하는 남성성을 억압하며 점차 무의식 속으로 숨기게 됩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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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신이 갖고 있는 성향이나 본성이지만 스스로 부정하고 억압하는 인격적 특성을 심리학에서는 ‘그림자 인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자 인격은 종종 다른 사람들의 눈에, 특히 가까운 배우자나 가족에게는 쉽게 드러나지만, 정작 자신은 잘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러니까 누군가의 그림자 인격을 보고 강하게 비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속해 있는 그림자 인격, 이를테면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힘든 욕망이나 이기심, 나태하거나 속물적인 경향을 상대방에게서 발견함으로써 자신에게도 그러한 그림자 인격이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부인하는 일종의 방어기제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때 남자가 가진 여성성인 아니마와 여자가 가진 남성성인 아니무스 역시 각각 고유의 성을 타고난 남자와 여자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그림자 인격의 속성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만약 우리의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각각 다른 이성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투사한다면, 상대 이성이 마치 여신이나 영웅으로 느껴지지만, 반대로 부정적 이미지를 투사할 경우 악독한 마녀나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렇듯 처음 만난 순간부터 무언가에 홀린 듯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시작된 사랑이 얼마 지나지 않아 너무도 생경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게 느껴지는 이유를, 우리는 얼마간 우리 내면에 자리한 아니마나 아니무스를 상대에게 투사하는 행위에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질 때는 각각의 이성이 가지고 있는 특성, 즉 남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측면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강인한 힘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남성에게 매료되는 여성이나 풍부한 감성을 바탕으로 타인을 부드럽게 포용하는 여성에게 반하는 남성에게서 우리는 각자의 아니마나 아니무스가 상대 이성을 통해 긍정적으로 발현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완벽한 인간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완벽한 상대라고 여겼던 이성에 대한 이미지에 하나둘씩 금이 가고 환상이 처참히 깨지는 순간부터 상대는 특별하기는커녕 마치 허점투성이인 하찮은 상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완벽에 대한 나의 환상을 상대에게 투영해서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바로 보지 못한 것처럼 부정적인 아니마나 아니무스에 사로잡힌 자아가 만들어 낸 왜곡되고 폄하적인 평가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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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은 우리가 무의식적인 아니마나 아니무스를 만날 때 보통은 부정적인 측면을 먼저 접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즉, 각자의 무의식 속에 있던 아니마나 아니무스의 영향을 받아 부정적인 측면이 그 특색을 드러내는데, 이것을 가리켜 ‘아니마 기분(Anima mood)’과 ‘아니무스 의견(Animus opinion)’이라고 칭하면서 아니마 기분에 휩싸인 남성은 우울감이나 변덕, 짜증과 원망이 깊어지고, 아니무스 의견에 사로잡힌 여성은 경직된 사고나 고집스러운 태도를 보이게 된다고 이야기하죠.

아니마 기분에 사로잡힌 남자는 우울감과 비참함에 자주 휩싸이며 심리적으로 위축된 모습을 보이면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 대신 주관적이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취하게 되고, 융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여성이 앙탈을 부리는 것 같다.”라고 묘사되기도 하죠.

이처럼 남자의 감정이 아니마의 지배를 받으며 현실적인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하면 감정적인 변질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객관성을 잃고 논리와는 점점 멀어지기 때문에 여자와의 관계에서 이성적인 대화나 감정적 소통을 하는 것이 곤란해집니다.

이에 대해 심리학자 제임스 힐먼(James Hillman)은 “남자가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설명할 수 있으려면 아니마가 그 모습을 감추고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아니마가 밖으로 나와 어떤 상황에 관여하게 되면 문제가 감정적으로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합니다. 즉, 남자의 아니마가 있어야 할 자리는 외부가 아닌 그 자신의 내면이라는 의미로, 아니마의 긍정적 측면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성성을 인식하고 여성성의 가치를 존중하며 여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대화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충고합니다. 또한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중에서도 부정적인 감정을 잘 인식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며 표현할 수 있을 때 아니마는 외부가 아닌, 원래 있어야 할 자리인 내면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이지요.

반대로 아니무스 의견에 지배당한 여성은 상대에 대해 섣부른 판단을 하거나 일반화의 오류에 갇히기 쉽고, 직설적인 말이나 비판적인 태도를 일삼으며 의도치 않게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여성의 아니무스가 부정적으로 작용한 영향으로, 여성의 타고난 특성인 상대를 포용하고 보살피며 공감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데 훼방을 놓기 때문이지요.

여성의 아니무스가 부정적으로 외부에 발현될 때는 상대를 심하게 몰아붙이며 공격적이 되고, 이것이 자기 자신을 향할 때는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비판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니무스 의견은 실제로 자신의 목소리라기보다는 인류가 오래전부터 힘과 성공, 논리로 대변되는 남성성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 데 반해 화합과 포용을 상징하는 여성성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면서 사회적으로 주입되어 온 신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래 사귄 연인이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결혼의 연은 맺은 부부 사이에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경우, 그 이유는 커플마다 또는 그 상황마다 제각각일지언정 남자와 여자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부정적으로 발현될 때 서로를 자극하는 성질이 있음을 아는 것이, 자신은 물론 상대 이성과 갈등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남녀 간에 갈등이 생겼을 때 아니마에 사로잡힌 남자가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갈등을 회피할수록 여자의 아니무스가 자극되어 더 공격적이 되고, 남자를 지배하려는 경향으로 흐를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는 침착하고 이성적인 태도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여자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을 멈추고 자존심을 지켜 주면서 포용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 준다면, 그들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외부가 아닌 원래 있어야 할 각자의 내면으로 돌아가 보다 성숙한 인격과 관계를 향해 나아가는 데 교두보가 되어 줄 것입니다.    

 

서울역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희주 원장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역 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졸업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전)성동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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