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장승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제 어린 시절은 주로 엄마와의 관계뿐이었어요. 이웃이나 친구와의 교류는 거의 없었고 엄마와도 눈을 마주친다거나 따뜻한 포옹을 느낀 기억이 없어요. 손을 잡고 함께 걸으면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어요.

커 가면서도 엄마와 거리를 느끼고 벽을 사이에 둔 느낌이어서 저는 책 안에서 위안을 찾았어요. 활자 안의 세상과 사람들이 더 편해요. 지금도 펜팔이 아니면 마음을 열지 않아요. 

어느 날, 엄마는 왜인지 화가 나 있었고 저를 방으로 불렀어요. 그리고는 갑자기 제 어깨를 붙잡아 흔들면서 “죽어, 죽으라고! 너 죽고 나 죽자.”라고 소리를 지르셨어요. 그때 정말 사람이란 지겹다 느꼈어요. 그 일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지만 최근에도 엄마가 화나서 제게 소리 지르는 때가 오면 저는 그 옛날이 생각나고 사람이 몹시 지겨워져요.

제게 늘 잘해 주는 좋은 사람들도 지겨워요. 그럴 때마다 펜팔을 찾아요. 엄마 외에 인간관계를 늘려도, 엄마보다 저와 잘 맞는, 불쑥 폭발하지 않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도 엄마가 떠오를 때면 그 사람들도 모두 지겹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어요. 

엄마는 바뀌지 않아요. 제가 엄마가 소리 지르는 상황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절망적인지 아무리 설명해도 엄마는 그런 거 모르겠다는 천사 같은 얼굴로 왜 너는 나와 잘 못 지내느냐고 합니다. 저는 기만당하는 기분이고 화가 나고 눈물이 나요.

제가 무얼 극복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저 자신이 지겨워지기도 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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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을 읽으면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느끼시는 피로감과 난감함이 많이 느껴졌습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무의미, 지겨움과 함께 삶에 대한 회의감을 함께 느끼시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사연을 통해 그려 본 어머니의 모습은 정서적으로 사연자님과 거리감이 있고 친밀감, 따뜻함, 수용되는 느낌 같은 감정적 표현을 하지 않으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주어야 할 사랑을 주지 않으셨던(withhold)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연자님께서는 자연스럽게 신뢰나 인정, 사랑, 친밀감처럼 생애 초기에 느껴야 할 정서적 지지와 안전감, 상호작용을 경험할 기회를 충분히 갖기 어려우셨을 것입니다. 

어머니를 비롯한 주양육자, 가족들과의 관계는 우리가 태어나서 최초로 경험하는 타인과의 관계로서 신뢰를 형성하고, 정서를 교류하며, 사회적 작용을 학습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이 관계에서 형성된 애착이 이후 또래 집단이나 더 큰 사회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감정적 교류를 하는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머니와의 관계는 더 많은 사람, 더 넓은 세상과 연결되도록 하는 초석이자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이런 학습을 위한 상호작용이 충분히 일어나지 않았기에 사연자님이 어머니 외의 다른 분들과 충분히 교류하고 마음을 나눌 기회가 많지 않았을 테지요.

 

어린 시절 주변 이웃이나 친구와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고 말씀해 주신 점으로 비추어볼 때 사연자님뿐만 아니라 어머니 역시 사회적으로 위축되고 타인과 많이 교류하지 않는 삶을 사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사연자님이 타인과 관계를 맺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타인과의 관계 욕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고 소통하고 싶어 하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연자님은 어머니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충족되지 않는 관계적 욕구를 책 속의 인물들, 펜팔 친구들을 통해 채우기 위해 애쓰셨던 것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기대되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친밀감, 안정감을 책 속의 세계, 펜팔을 통해 채우려고 하셨던 것은 아닌지요. 

어머니께서 사연자님을 불러 죽자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머니가 당시 어떤 상황이셨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사연자님을 지켜주고 사랑해주어야 하는 존재인 어머니가 죽자고 이야기하셨을 때 사연자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놀라고, 무서웠다, 당황했다’가 아닌 ‘지겹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 그때까지 느껴 오셨을 불안정감, 친밀한 관계에서의 신뢰감이나 기대감의 부재, 좌절감을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지겹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은 사람이 지겹고 싫은 것보다 현실에 있는 사람들을 믿어도 될지 불안하고 혼란스러우신 것은 아닐까요. 사연자님에게 애정을 주지 않고 때로는 존재 자체를 위협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인간상의 전형으로 각인되면서 다른 사람들 역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기에 잘해 주고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좋은 사람들을 만났을 때도 쉽게 마음을 주기가 어려운 것이겠지요. 이 사람 역시 언젠가 어머니처럼 애정을 보류하고 사연자님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을까, 소리 지르고 위협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 결국은 내 관계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리라는 좌절감이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문득 어머니가 떠오를 때면 또다시 어머니와의 관계 같은 관계가 반복될 것 같은 마음에 물러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충분히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도 사연자님에게 익숙하고 안전한 세상이라고 인식되는 펜팔을 찾게 되시는 것일 테지요. 

지겨움’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셨는데 그 말속에 사실은 ‘불안함’, ‘혼란스러움’,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 ‘사랑받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해서 슬프고 속상했던 마음’과 같은 복합적인 감정들이 섞여 있는 듯합니다. 다만 이런 감정들을 솔직하게 꺼내놓고 들여다보기가 조심스러워서 애써 덮어둔 채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감정적으로 무감각(emotional numbness)하신 것처럼 여겨 오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어머니는 바뀌지 않을 테니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편이 낫다.’라고 무의식 속에서 결론 내리신 것은 아닐까요.

사람이 지겹다는 말씀이 쓸쓸하고 마음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연자님이 정말 사람이 싫으신 것일까, 사람이 지겹기만 하신 것일까 질문해 보면 그렇지 않으시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은 따뜻함, 친밀함, 사랑, 안정감 같은 감정들을 누구보다 필요로 하고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요. 다만 그 길에 도달하는 방법을 아직 모르고 계신 것일 테지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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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의 관계를 모든 대인관계의 표준으로 여기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을 조금씩 바꿔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말씀하신 대로 어머니는 쉽게 바뀌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사연에서 남겨 주신 어머니의 대인관계나 행동들을 보았을 때 어머니께서 어느 정도 우울감을 경험하고 계실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그렇기에 사연자님과의 관계에서 애정 어린 표현이나 변화를 당장 기대하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연자님이 삶에서 만나게 되는 이들은 어머니와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언제나 좋은 감정만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서운함, 실망감, 배신감 등을 느낄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신뢰, 우정, 사랑, 배려 같은 긍정적인 경험을 하실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긍정적 감정이든, 부정적 감정이든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은 우리 삶을 다채롭고 활기차게 해 줍니다. 

우리 삶은 하얀 도화지와 같습니다. 그런데 사연자님은 현재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경험하셨던 감정들로 그 도화지를 온통 무채색으로만 칠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색깔로 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말이죠.

물론 새로운 변화와 시도가 낯설고 두려울 수 있습니다. 과연 이 사람을 믿어도 될까, 나를 또 실망시키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한 발을 내디뎌 그 길을 걸어가 보기 전에는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타인들과 관계 맺지 않는 삶이 안전함을 보장해 줄 수는 있겠지만, 그 안전함이 사연자님을 언제까지나 고립된 채로 남겨두는 외딴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을 혼자 시작하기가 두려우시다면 상담을 병행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사연자님에게 있어서 신뢰와 애착이 어떤 의미인지, 친밀한 관계를 맺는 데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시면서 새로운 발걸음을 떼보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합정꿈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장승용 원장 

장승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합정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인하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인하대병원 인턴 및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한국정신분석학회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Master class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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