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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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 씨는 오늘 밤 쉬이 잠들지 못해 내내 뒤척이고 있습니다. 내일은 성진 씨와 3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을 약속한 남자 친구를 부모님께 정식으로 소개하기로 한 날. 성진 씨는 부모님이 과연 남자 친구를 마음에 들어 할지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이번에도 엄마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지? 또 헤어져야 하나?’

성진 씨의 엄마는 그녀의 일이라면 그동안 사사건건 간섭과 통제를 했습니다. 지금의 남자 친구를 만나기 전, 진지하게 교제해 온 연인을 소개했을 때도 외모가 어떻고, 학벌이나 직업도 영 마음에 안 든다면서 성진 씨만 보면 ‘언제 헤어질 거냐.’고 이별을 종용해 왔습니다. 그리고 항상 마지막에는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건데, 왜 이렇게 엄마 마음도 모르냐.”는 말로 성진 씨를 철없고 이기적인 딸로 몰아갔죠.

성진 씨의 엄마가 그녀에게 관여하는 일들은 비단 이성 교제 문제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크게는 성진 씨의 전공이나 진로 선택 문제, 작게는 헤어스타일과 의상, 거기에 친구 관계까지 어머니의 레이더망을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기준이나 기대에서 딸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모습을 보일라치면 가차 없이 딸을 비판하며 그녀를 깎아내렸고, 성진 씨는 언제쯤 어머니의 마음에 흡족한 딸이 될 수 있을지, 그런 날이 올 수는 있을지 의구심을 가지며 점점 더 지쳐만 갔습니다.

 

앞서 제시된 성진 씨의 사례를 잘 살펴보면,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나르시시스트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르시시스트는 겉으로는 자신감이 넘치고, 매력적인 존재로 비치기도 하는 반면에 그들의 내면은 어딘가 늘 공허하고, 낮은 자존감과 불안감, 분노와 자기혐오에 시달리고 있어서 타인의 인정이나 관심을 끊임없이 갈구합니다. 그러나 정작 나르시시스트인 당사자는 자기 내면 안에 이렇게 취약하고 수치심을 느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이러한 부정적 감정을 남에게 비난, 독설 등을 함으로써 해소하게 되죠.

그런데 만약 이러한 나르시시스트가 성진 씨의 경우처럼 부모인 경우라면 어떨까요? 대부분의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녀를 통해 자신의 우월감과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사람들 앞에서 실수하거나 실패하는 모습을 보이면 내면의 깊은 수치심이 자극되어 견디기 힘들어하고 실패한 자녀를 향해 폭언과 비난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 부모를 둔 자녀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됩니다.

이들은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그들에게 진실한 관심을 보이거나 필요한 정서적 욕구를 채워 주는 데는 무심한 반면, 오히려 자녀를 자신의 감정적 욕구를 채우기 위한 존재, 자신을 힘들게 하는 존재, 귀찮은 존재로 치부하며 무시하는 행동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성장해서 경제력을 가지게 되고 독립하려는 조짐을 보이기라도 하면 자녀의 죄책감을 자극하며 끊임없이 관심을 요구하며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죠. 

어려서부터 부모의 인정과 사랑에 목말라 있던 자녀는 성인이 되어 부모의 필요와 욕구를 채워 준다면, 언젠가는 인정과 사랑을 베풀어 줄 거라는 한 가닥 희망을 부여잡고 부모의 곁을 계속해서 맴돌지만, 대부분의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녀의 바람이 실현되기란 결코 쉽지 않죠.

혹시 여러분 가운데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부터 ‘쓸모없는 아이.’,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아이.’, ‘이기적인 아이.’처럼 비난을 위한 비난을 줄기차게 받아 온 분이 있다면, 여러분의 부모가 나르시시스트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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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러분의 부모가 이러한 나르시시스트라고 판단된다면, 하루빨리 부모의 욕구나 필요를 채워 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최대한 부모로부터 정서적 · 물리적으로 분리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껏 부모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쏟았던 에너지를 자신에게로 돌려 상처받은 영혼과 피폐해진 마음을 치유하는 데 집중하십시오. 이제는 부모가 아닌 자신의 감정을 돌보고 회복하는 시간을 가져 보세요.

오랫동안 나르시시스트의 부모에게서 양육된 자녀는 왜곡된 자아 정체감을 형성하거나 자존감이 많이 무너진 상태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왜곡된 자아상과 무너진 자존감을 바로 세워 나가야 합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자녀에게 주입한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아 나가야 합니다. 만일 ‘쓸모없는 아이’라는 메시지를 직간접적으로 들어 왔다면, 그것은 부모의 왜곡된 메시지이고,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나에 대한 건강한 신념으로 재정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건강한 신념을 뒷받침할 근거들을 하나둘씩 채워 나가 보세요. 이렇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잘못된 신념들을 건강하고 올바른 신념으로 대체해 나가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 가시기를 권유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자녀라면,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정체를 눈치채고 거리를 두려 할 때, 그들은 귀신같이 이를 감지해서 눈물로 호소하며 자녀의 죄책감을 자극하거나, 뉘우치는 척하며 자녀를 다시 옭아매는 데 귀재라는 사실이죠. 

물론, 우리에게는 누구나 건강한 자기애부터 자기중심적인 경향까지 자기를 중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 다른 사람보다 나를 우선시하는 태도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의 경우, 다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은 하찮게 여기면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하나의 인격으로 대하기보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거나 가치를 높이는 하나의 도구처럼 취급한다는 점에서 건강한 자기애와는 뚜렷한 차이점을 보입니다. 

그렇지만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진단은 오직 전문의에게서만 받을 수 있으며,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을 몇 가지 지니고 있다고 해서 상대를 섣불리 나르시시스트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 가까운 가족, 특히 부모나 남편, 연인과 같이 중요하고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이 많이 엿보이거나 그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 왔다면, 지금이 그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야 할 타이밍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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