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제목 그대로입니다. 요즘 이런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많이 떠올라요. 오늘 자정에라도 떠날수 있지만 용기가 안 나서 지금까지 질질 끌고 있어요. 폭식증과 우울증을 16년째 앓고 있어요. 병원도 다니고, 상담치료도 받았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어요. 우선 제 의지가 많이 부족해서 그랬죠. 그리고 토하지 않으면 먹은 게 다 살로 갈 거란 공포감에 구토도 해요. 이는 다 부식되었고, 음식을 먹기만 하면 소화가 잘 안 되고, 고개 숙이면 자동적으로 구토가 되는 지경까지 왔어요.

하루 종일 먹는 생각밖에 안 해서 일상생활이 안 돼요. 먹는 것만 검색하고, 그런 방송만 보면서 하루 종일 먹고 토를 하는 게 일상이에요. 구직자여서 취업 공부도 해야 되는데, 머릿속에서 거부하고 매일 먹을 것만 미친 듯이 갈구합니다.

폭토(폭식과 토하기)’ 때문에 인생이 다 망가졌어요. 다니던 직장도 가뜩이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인데, 폭토까지 하면서 다니려니 너무 힘들어서 그만뒀어요. 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되는데, ‘마약에 빠진 환자’처럼 나에게 행복을 주는 유일한 활동인 폭식하는 방법만 연구하고 있어요.

인생의 바늘 코 하나가 잘못 들어가면 모든 일을 망치듯이, 폭토 때문에 가족과 사이도 안 좋고, 가게에서 사장님들한테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고, 주변 지인에게 들켜서 창피도 당하고, 돈도 많이 쓰게 되고, 치과 치료도 많이 받고 있어요. 

정말 노답이죠. 희망이 없는 인생 같아요. 앞으로 저는 나아질 거란 조그만 희망이라도 있으면 그거 하나 붙잡고 노력하겠어요. 하지만 지난 16년을 돌아보면 폭토 때문에 매일 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공부 대신 식당에 다니면서 폭식하고 토하는 게 습관화된 쓰레기 같은 인생이에요.

제가 죽으면 가족이 ‘행복?’까지는 아니지만 지금보다 걱정을 덜하면서 살 것 같아요. “우리 집에서 너만 문제다.”라는 아버지의 말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죽을 용기가 없어요. 죽을 준비는 다 해 두었어요. 하지만… 용기가 없어요. 

사실 그 전에 다니던 직장 일이 정말 힘들었어요. 매일 13시간을 앉아 보지도 못하고, 물도 못마시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고객에게는 쌍욕을 듣고, 발로 맞아도 참고 다녀야 하는 곳에서 7년간 일하면서 ‘나는 살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어요. 하루하루 버티면서 ‘폭토’로 스트레스를 풀며 살았죠. ‘이러다가 내가 죽으면 내가 벌은 돈은 다 부모님과 오빠한테 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가족만 바라보고 버텼죠. 

직장을 그만두면 가족이 저를 보듬어 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들도 그들 나름의 인생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느라 저의 고통까지는 돌봐 주지 않더라고요. 엄마의 첫마디가 아직도 생각나요. ‘내가 왜 너 같은 정신병자를 이해해야 하냐.’, ‘너 같은 애가 결혼하면 어느 귀한 집 아들 인생을 망칠 거냐.’면서… 사실 저도 공감하는 말이에요. 

글을 적다 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16년 동안의 제 인생의 고난과 생각을 여기에 다 적을 순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제 인생에 대한 의견을 내 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적었어요.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사연자님의 고민글 찬찬히 잘 읽어 보았습니다. 폭식증과 우울증을 16년째 앓고 있다는 말씀에서 그간 사연자님께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 오셨을지… 감히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 고통의 깊이가 이 글을 통해서나마 조금은 전해지는 듯하여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편으로는 요즘 들어 자살에 대한 생각이 들 정도로 더욱 마음의 고통이 심하신 것 같아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글도 써 보고, 다각도로 조금만 더 힘을 내셔서 노력해 보신다면 충분히 좋아지실 수 있다는 말씀 꼭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희망을 잃지 마시고 이번 인터넷 상담을 계기로 우울증과 폭식증에 대한 전문 치료나 상담을 재개하고 지속적으로 받으시면서 일상생활에서도 좋아지기 위한 실천을 꾸준히 이어 가시기를 당부드립니다.

하루 종일 먹는 생각밖에 안 들고, 그런 방송만 보면서 하루 종일 먹고 토를 하는 게 일상이라고 고백하시는 대목에서 당장에 ‘먹는 방송’의 시청부터 단호하게 중단하시라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현대사회는 음식에 대한 광고, 음식에 대한 먹방 등 음식의 섭취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거라는 광고로 사람들의 소비를 부추깁니다. 

사연자님처럼 음식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고, 조절이 힘든 상태에서 그러한 영상을 보는 행위 자체가 섭식에 대한 욕구의 자극과 행위로 직결되기 때문에 먹방 영상 시청을 비롯해 섭식 행위를 촉발하는 방아쇠 요인(trigger factor)을 파악해서 그 목록을 작성하고 눈에 띄는 곳에 붙여 둠으로써 의도적으로 촉발 요인이나 그와 관련된 행위들을 피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우리가 폭식을 조절하기 힘든 이유 중에 하나는, 섭식 행위 자체가 ‘자동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식사를 의도적으로 계획하거나 이성적으로 해야 할 행위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배가 고프면’ 혹은 뭔가가 ‘먹고 싶다’는 느낌이 들면, 순간 무의식적으로 음식을 입으로 넣게 됩니다. 그리고 섭식 행위는 대개 즉각적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혹은 생존을 위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활동이므로, 단순한 차원의 행동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섭식 행위는 여러 가지 촉발 요인이나 감정, 사고, 자극, 반응, 환경, 경험들이 연결된 복잡한 행위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평상시 식습관을 잘 살펴보고, 섭식 행동과 관련된 촉발 요인들을 잘 통제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폭식과 같은 섭식 행위 조절에 실패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심리적인 부분입니다.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에 대한 반응으로 체내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즉,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르티솔(cortisol)이 분비되어 혈당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배고픔을 느끼게 되고, 음식을 먹으면 뇌에서 세로토닌(serotonin)을 분비해서 기분을 좋아지게 만듭니다. 뇌가 스트레스나 부정적인 감정을 간단하고 손쉬운 방법으로 풀고자 하는 시도로서 폭식 행동이 반복될 수 있는 것이죠. 

보통 폭식증과 같은 식이장애를 앓는 경우, 기분장애, 불안장애, 성격장애 등과 흔히 동반되는 것이 특징이며, 특히 우울 증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우울이나 불안, 분노와 같은 심리적 어려움을 폭식으로 해결하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사연자님께서도 과거에는 힘든 직장 생활에서 유발된 스트레스, 현재는 구직이나 취업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오랜 식이장애로 인해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들로부터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등 강도 높은 스트레스와 외로움, 긴장감, 절망감, 우울과 불안 등의 감정적인 어려움이 겹쳐지면서 이를 폭식 행위로 충족하거나 조절하는 방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동 패턴이 굳어진 것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또한 이러한 폭식 후에 죄책감이나 자기 비난과 같은 심리적 반응이 뒤따르면서 자존감을 저하시키고, 좌절감과 우울감이 깊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듯하여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폭식증과 구토 관련 문제는 생물학적 요인, 호르몬 분비 이상, 정신과적 어려움이나 저하된 자존감, 가족과의 갈등, 충동 조절의 어려움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해 발생 및 지속되는 문제인 만큼, 단순히 ‘개인의 의지가 약해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식의 생각은 올바른 접근법이라 할 수 없습니다. 

폭식증의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가 치료제의 1순위로 사용되는 이유도 바로 생물학적 원인 때문으로, 음식을 먹을 때 포만감을 느끼게 해 주는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나 엔도르핀가 관련된 문제가 있을 때 폭식증이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계속 보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개인의 의지의 문제이기보다 전문적인 치료나 필요한 경우, 약물치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문제로 폭식증 치료를 접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흔히 폭식이 유발되면 식욕억제제를 처방받아서 복용하기 쉬운데, 이는 오히려 폭식증 환자에게 우울증을 유발하거나 충동 조절의 어려움을 겪게 해 절식과 폭식을 반복하게 하므로 식욕억제제 복용은 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지난 16년간 폭식증과 우울증을 앓아 오며 경험하신 심리적 고통감과 마음고생이 상당하셨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성실하게 직장 생활도 해 오시고, 나아지겠다는 일념하에 여러 번 치료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셨을 것을 생각하면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비록 많은 좌절 경험을 겪으며 너무도 고통스럽고 순간순간 포기하고 싶은 고비도 많으셨겠지만, 소중한 사연자님 자신과 인생을 위해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인생의 바늘 코 하나가 잘못 들어가면 모든 일을 망친다.’는 다소 극단적이고 된 신념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파악됩니다. 또 사연자님을 향한 가족들의 말들, “우리 집에서 너만 문제다.”, “내가 왜 너 같은 정신병자를 이해해야 하냐.”, “너 같은 애가 결혼하면 어느 귀한 집 아들 인생을 망칠 거냐.” 등등. 이런 말들은 타인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 특히 소중한 가족에게는 더더욱 해서는 안 되는 폭언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가족들의 폭언은, 폭식과 구토로 인해 크나큰 고통을 겪고 있는 사연자님께 힘과 도움이 되기는커녕 사연자님의 마음 안에 슬픔과 공허감, 분노와 적대감을 느끼게 만들고, 낮은 자존감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당분간 가족들과는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하시기를 권고드립니다. 대신에 사연자님의 심리적 좌절감과 결핍감, 손상된 자아상 등을 함께 건강하게 다루고 재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적인 상담 및 치료를 꾸준히 이어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반복된 병원 및 상담 치료의 실패로 인해 불신감과 회의감이 들 수 있다는 점,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다시금 소중한 사연자님 자신을 위해 조금씩 힘을 내서 하루에 한 가지, 작은 노력이라도 시도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비단 음식과 관련된 폭식 문제를 해결한다기보다 사연자님 인생에 깊게 뿌리내려서 사연자님을 힘들게 만드는 문제들을 하나씩 발견하고 또 치유하고 또 성장해 나간다는 식의 생각과 태도로 접근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폭식이나 야식, 구토 등 건강을 해치는 잘못된 습관을 건강한 식단으로 바꿔 나가고, 손상된 자아상을 다시 건강하게 구축하며, 평소 스트레스가 누적되지 않도록 다양한 스트레스 대처 기술(ex, 산책, 스트레칭, 마음 챙김 및 명상, 감정 조절 훈련, 자기주장 훈련, 인지적 재구성, 호흡법, 근육 이완, 취미 생활)을 습득하고 실천하는 등 일상에서 사연자님께서 시도할 수 있는 다양한 노력들과 함께 전문적인 치료(필요한 경우 약물치료, 정신치료, 상담치료, 인지행동 치료 등)를 병행해 나가시기를 권유드립니다.

반드시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때로는 다시금 포기하고 싶어질 때면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자책하기보다 다독이고 위로해 주면서 회복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서울역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희주 원장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역 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졸업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전)성동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의
전문의 홈 가기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살피려는 노력을 하기, 그리고 작은 목표를 달성했을 때
    ‘의식적으로’ 목표에 대해 보상하기. 중요한 내용을 많이 배워갑니다!"
    "근육을 키운다는 느낌으로 조금씩 실천해봐야겠어요. 고맙습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