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올해 나이 스물세 살의 여자입니다. 키는 148cm로 작고, 얼굴도 작고 눈도 작은 게 동글동글해서 어린아이 같습니다. 회피성 성격도 있어서 아르바이트 찾아보기도 힘든데, 집안 사정도 좋지 않아서 옷도 잘 입지 못합니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것이 기분 나쁘게 하는 것 같고, 민폐인 것 같아서 아르바이트 지원하기도 미안합니다. 진상 손님을 본 적은 없지만, 대응 못할 것 같고 무섭습니다. 사회성이 없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초등학교 때부터 소통하고 교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존재가 민폐라고 생각해서 이렇죠.

아버지는 할아버지 때부터 주로 복숭아와 사과, 벼를 농사지어 오셨습니다. 저는 정보처리산업기사 실기를 공부 중입니다. 하지만 공부에 집중을 못하겠고, 계속 떨어지는 와중에 언제부터인가 수확을 도와드리러 내려가면, 당연하다는 듯이 농사를 물려받으라는 말을 하십니다. 

제가 아무리 사회성이 떨어지고 당장 직업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농사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옆에서 도와드렸기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직 관심 있는 분야가 있는데 시골에서 나무만 보자니 미련이 남고, 허무합니다. 답답하고 우울한 기분이 듭니다.

시기마다 혼자서 500상자 이상 수확할 자신 없고요, 아직 1종 면허도 못 땄는데 트럭 운전이나 경운기 관리, 수리하는 것도 자신 없습니다. 혼자서 할 생각을 하니 막막합니다. 게다가 어차피 결혼하지 않을 거라서 저 뒤로 물려줄 사람도 없을 테고요. 땅도 영원한 것도 아니고, 흥미를 못 느끼겠습니다.

그동안 아버지께서 과수원을 일구기 위해 노력하시고 애착을 갖는 것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 농사를 물려받을 생각을 하면, 저는 압박감과 우울감을 느끼고, 불안하고 답답해집니다. 자신도 없고요.

제가 관심 있는 직업들은 이렇습니다.


- 제빵사: “요리는 과학이다.”라는 말을 좋아할 정도로 재료와 조리 방법, 온도에 따른 상혼 관계를 따져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메뉴 계발과 제빵 기술에 흥미를 느낍니다. 하지만 제빵계는 레드오션, 자영업이라서 그런지 기술직이라도 안정감을 느낄 수 없고, 나이가 있는 경우엔 우리나라에서 웬만하면 자리 잡기 힘든 듯합니다. 창업은 사람을 부리고, 사들이고, 대출하고 해야 하는데, 자신이 없습니다. 이쪽으로 취직해서 경험이라도 쌓아 볼까 하면 그건 그것대로 미안합니다. 생긴 게 그렇고 사회성도 그래서, 그곳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습니다.

- 개발자: 저는 검정 2년을 나왔습니다. NCSI 산업 육성 사업에도 들어갔습니다만, 팀원들과 계속 소통해야 하고, 평생 프로그래밍을 배우고, 구글링 해야 하며, 코드를 못 짜면 물어봐야 하는 일이잖아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퇴사 권고 일이 제 일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35세에 퇴사한다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제가 회사에 들어가는 건 민폐인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 전산직 공무원: 인반 행정직과는 다르게 두세 명만 배치하니 수직 관계가 생기지 않고, 어떻게든 자기 일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가끔 교육 강사 초청, 기기 관리, 서버 패치 및 수정, 극소수 민원을 해결한다고 하는데, 현재 가장 유력하게 생각하고 있는 직업입니다.

막상 직업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때가 되면 어쩔 수 없이 내려가야 하나 생각하게 됩니다. 쉽게 결정하지도 못하고, 이도 저도 못하겠네요. 20~30년… 인생 참 기네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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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올려 주신 고민글 찬찬히 잘 읽어 보았습니다. 부모님의 가업을 물려받는 문제와 사연자님께서 관심 있는 직업들 사이에서 진로에 대한 고민이 깊으신 듯합니다. 

수많은 직업 중에서 나에게 맞는 직업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서 꽤 중대한 문제이자 중요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업이란, 나의 생계를 유지하는 경제적인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업무적인 성취와 사회적 자아, 자아실현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영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적성과 관심, 또 소질과 재능, 흥미 등을 잘 파악하고 이에 적합한 직업을 선택하며 직업적 커리어를 잘 발달시켜 나갈 때, 우리는 경제적·직업적·사회적 안정감을 획득하고 균형감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이러한 진로 선택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계시고, 이와 관련해 앞으로의 미래를 설계하고, 직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과정에 있으십니다.

 

이렇게 여러 직업들 가운데 고민하는 와중에 아버지의 가업, 즉 ‘농사를 물려받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부모님의 제안을 듣고 복잡한 심경에 휩싸이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연자님께서 이러한 부모님의 제안에 거부감이 들고 압박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농업은 사연자님 본인의 흥미나 관심사, 능력이 고려되지 않은 직업 영역으로, 단순히 부모님께서 해 오셨던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업을 잇는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사연자님께서는 아버지의 권유에 ‘만약에 내가 정말 농사를 짓는다면…?’이라는 구체적인 상상을 해 보셨던 듯합니다. 그리고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많은 신체 노동을 필요로 하는데, 체구도 작은 사연자님께서 현실적으로 농사를 짓기에는 체력적으로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셨고요.

또 이러한 물리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농사 자체에 흥미를 못 느끼겠다는 사연자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에 더해 농사를 물려받을 생각만 하면 우울감과 답답함을 느낀다고 하셨잖아요, 사연자님께서 평생 종사하게 될 수도 있는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울해진다면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께는 ‘농사를 짓고 싶지 않을뿐더러, 농사를 물려받을 생각이 없다.’는 사연자님의 의사를 확실히 하시고, 사연에 올려 주신 것처럼 그 이유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씀 드리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께 사연자님의 의견을 확고히 하셨다면, 이제는 사연자님께서 관심이 있고, 현실적으로도 고려해 보셨던 직업군에 도전해 보신다면 어떨까요?

사연자님께서 올려 주신 주된 고민 주제는 ‘농사를 물려받기 싫고, 다른 일에 미련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농사 이외에 관심이 있고, 시도해 볼 만한 직업군을 몇 가지 추려서 자신의 적성과 맞추어 보고, 또 직업 특성상 필요한 자질 등을 분석해 보는 사연자님의 안목과 분석력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빵사나 개발자, 전산직 공무원 등으로 직업군을 좁혀 나가고, 현실적으로 가장 유력하게 생각하고 있는 직업으로 전산직 공무원을 꼽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장단점이나 성격적 특징, 일의 특성 등을 잘 파악할 수 있는 것 또한 사연자님께서 가지고 계신 좋은 능력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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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연자님께서 적어 주신 내용 중 계속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사연자님 스스로에 대해 “존재 자체가 민폐”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글을 통해 제가 사연자님께 감히 말씀 드릴 수 있는 확실한 한 가지는, 존재 자체가 민폐인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연자님께서 언제부터, 어떠한 이유로 스스로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연자님의 외적 조건(작은 키나 어린아이 같은 외모라고 평가해 주신 점)이나 좋지 않은 집안 사정, 외적으로 비쳐지는 부분(옷도 말 입지 못한다고 기술해 주신 점), 회피적 성격 등이 사연자님 자신의 가치를 규정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이처럼 스스로에 대해 낮은 평가를 하고 계신 것이 사연자님께서 직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제약을 가져오는 듯합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제빵 기술과 메뉴 계발에 흥미를 느껴서 이쪽 분야에 도전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외모나 사회성에 대한 자신감 부족으로 도전 자체를 포기하고 계신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개발자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이고요.

 

요즘 많은 화두가 되고 있는 자존감에 대해서 사연자님께서도 많이 들어 보셨을 텐데요, 자존감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느낌으로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존중한다는 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바로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면서 타인의 마음이나 시선, 기준보다 자신의 마음과 기준에 가장 큰 무게를 싣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얼마만큼은 다른 사람들의 기준이나 비난, 세상의 잣대와 평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과거에 그러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경험이 자주 반복되어 왔다면 마음은 상처받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잘못 규정하거나 자기를 비하하는 태도를 형성해 왔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처럼 외부로부터 오는 평가와 시선들이 결코 우리의 가치를 규정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존감의 핵심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자기평가입니다. 따라서 자존감을 향상시키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가치 있다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자기수용 태도가 큰 도움이 됩니다. 

만약 사연자님께서 남들보다 다소 작은 키를 ‘못난 부분’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이것은 자기수용적인 태도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힘든 태도입니다. 그저 ‘내 키가 남들보다 조금 작지만 괜찮다.’고 받아들이실 수 있을 때 진정한 자기수용과 함께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나는 남들보다 키가 조금 작지만, 남들보다 더 귀엽다.’고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그것이 지금까지 사연자님께서는 잘 알아보지 못했던 진짜 사연자님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렇게 조금씩 사연자님에 대한 자기수용적 태도와 자존감을 향상시켜 간다면, 타인의 관점도 잘 수용할 수 있고, 소통과 교감하는 것을 좋아하는 원래의 사연자님의 모습도 되찾으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존재가 민폐’가 아니라,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분’이라는 말씀을 끝으로,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해 스스로 제약을 두셨던 부분들도 다시 재고해 보시기를 권유 드립니다.

그렇게 해 보고 싶던 일에 조금씩 도전해 보고, 실패해도 너무 많이 실망하지 말고 차근차근 원하는 꿈을 향해 나아가시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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