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인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는 현재 스물다섯 살이고, 해외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저는 첫째 딸로서, 저희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저에 대한 기대가 아주 컸습니다. 집안이 아무리 어려워져도 부모님께서는 결혼반지를 팔아서라도 있는 것 없는 것 다 긁어모아서 교육열이 높은 동네에 거주하며 저에게 사교육이란 사교육은 전부 시키셨습니다. 

저는 맞지 않는 전공 선택으로 인해 한차례의 전과와 편입 그리고 직장과 학업의 병행으로 입학한 지 6년이 되어서야 졸업을 했습니다.

부모님은 노후 준비는 전혀 못해도 제 공부는 꼭 시킨다는 생각으로 사셨습니다. 부모님이 노후 준비를 제대로 시작하신 지가 몇 년 안 되셨습니다. 저도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며 제가 원하는 바를, 그리고 원하는 점수를 노력하여 얻지 못한 적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때문에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제가 의사가 되기를 바라셨고, 더 열심히 살기를 바라셨지만 저는 의욕도 없고 게으른 사람입니다. 저는 그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초등학교 때는 이런 스트레스로 인해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습니다. 어릴 때 아빠가 제게 “너 수능 딱 10년 남았다. 너 진짜 열심히 해야 돼.”라고 했던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기대’로 인한 심리적 압박감이 컸었고, 이런 압박감이 저를 너무 힘들게 해서 중학교 때는 우울증을 진단받았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반항심으로 아빠랑 일 년 반가량 한마디 말도 안 나누었던 적도 있으며, 스무 살이 되어서는 토할 때까지 음식을 먹거나 약을 먹어 죽을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약 3년 전에는 엄마랑 같은 문제로 싸우고 아예 집을 나가 버리는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엄마는 더 이상 이에 대해 언하시지 않습니다. 

결국 병원에서 일할 수 있는 전공으로 졸업을 하고 병원에서 직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아빠는 여전히 제가 의사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아빠는 스스로가 공부 욕심이 정말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릴 때 가정형편으로 공부를 마음 편히 하지 못하셨고, 못 이룬 꿈을 제가 이루어 주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게 너무 힘듭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모님의 기대에 충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계속해서 압박감과 죄책감을 느낍니다. 

어쩌면 아주 오랜 후에, 미래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도 이런 생각이 계속 나를 갉아먹고 후회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미 복잡한 마음에 자꾸 저런 말을 들으니 너무 힘들고 ‘정말 그 꿈을 이루어야 할까?’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게 됩니다. 제가 늙어서라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요. 

공부에는 나이가 없다지만, 나이 40, 50이 되어서 뒤늦게 깨닫고 의대 공부를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잖아요. 어차피 한다면 일찍 하는 것이 좋을 테니까요. 정말 할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좋은 선택일까요? 어떤 삶을 살아야 후회가 없는 삶일지 너무 두렵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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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올려 주신 사연을 읽으면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서 ‘늘 잘해야만 한다.’는 부담감과 압박감을 느끼며 살아오셨을 사연자님의 마음이 어떠셨을지 짐작되어 글을 읽는 내내 저 또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간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그동안 사연자님꼐서 느끼셨을 괴롭고 힘든 감정은 최대한 절제하면서 오히려 담담하게 적고 계신 글에서 깊은 슬픔과 무력감이 전해지는 듯하여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사연에는 올해로 스물다섯 살이 되신 사연자님께서 해외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다고 적어 주셨는데요, 먼저 대학 졸업을 축하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초등학교 때부터 이렇게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그간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학업을 이어 오셨을지 굳이 말하지 않으셔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입시 현실이란 것이 부모님이나 다른 주변 사람들이 굳이 부담을 주지 않아도 치열한 입시 환경과 과도한 경쟁 분위기로 인해 스스로가 심리적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더해 사연자님께서는 학업이나 성적과 관련해 부모님의 공공연한 기대감과 압박감을 받으며 오랜 시간 버텨 오셨다고 생각하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부담스럽고 또 스스로를 얼마나 많이 채찍질하며 여기까지 오셨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동안 참 잘해 오셨다고, 대견하시다고, 애 많이 쓰셨다고 진심으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사연자님의 부모님께서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신념 하나만으로 그동안 모든 것을 사연자님께 투자하면서 쏟아부었을 겁니다. 아마도 사연자님의 부모님께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고의 교육 환경을 제공해 주고, 남들보다 앞서 나가는 사람, 학업과 능력이 뛰어난 아이로 키우는 것, ‘우리는 그렇게 못 살았지만, 내 자식에게만은 할 수 있는 최선의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해서 성공시키는 것’이 어쩌면 부모님의 삶의 목표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만큼 부모님의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자식의 교육을 위해 희생하신 것도 사실이겠지요.

물론, 사연자님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또 어려운 집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고자 애써 오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도 있으실 겁니다. 그러나 원망하는 마음도 있으시겠죠.  

왜냐하면 그동안 부모님께서 사연자님을 양육하고 교육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셨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자녀를 지나치게 학업이나 성취 위주로 평가하거나 통제하려 하고, 목표를 달성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는 과정에서 정작 사연자님의 힘든 마음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하셨던 것 같아요. 

나에 대한 누군가의 너무 큰 기대감은 당연히 심적으로 큰 부담감을 느끼게 합니다. 하물며 그 대상이 부모님이고, 지속적으로 학업과 성취와 관련된 압박감을 느껴 오셨을 테니 왜 부모님에 대한 원망감이 생기지 않으셨겠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 나 잘되라고 그러신 건데….’라며 마음 편히 부모님을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못하는 답답함 또한 있으셨겠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또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자책하는 시간들도 있으셨을 테고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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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절대로 사연자님의 노력이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말씀을 꼭 해 드리고 싶습니다. 

자녀는 비록 부모의 몸을 통해 이 세상에 오지만, 태어나는 순간 신체와 정신이 분리된 엄연히 서로 다른 존재입니다. 당연히 서로의 생각과 감정, 취향과 욕구, 가치관과 꿈, 원하거나 바라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연자님의 부모님께서는, 특히 아버지께서는 어릴 적 마음 편히 공부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좌절된 꿈과 욕구를 자녀인 사연자님께 투영해 자녀의 성공을 통해 본인이 못 다 이룬 꿈을 이루고자 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나 아무리 자녀의 성공을 위해 부모님께서 희생하시고 모든 것을 투자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부모님 본인들의 결정이었습니다. 

사연자님께서 바라거나 요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며 자책하거나 과도한 부담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그 무거운 부담감과 압박감, 자책감을 좀 내려놓으시고 가벼워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연자님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성찰 없이 부모님의 꿈을 대신 이루어 드리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님을 깊이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저는 사연자님께서 지금 당장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 다시 의대 공부를 해야 한다거나 또는 하시지 말라고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연자님 스스로 결정하셔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 사연자님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 사연자님께서 원하는 길인지, 사연자님의 꿈인지 말입니다. 아마도 이에 대한 대답이 사연자님께 의대 진학과 관련된 결정을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 누구도 나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습니다. 비록 그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인 부모님이나 남편 혹은 친구일지라도 말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시면서 이제부터는 주변인들이 사연자님 삶의 경계를 침범해 오지 않도록 건강한 경계를 세우시면서 본인이 원하는 삶을, 꿈을 향해 나아가실 수 있기를 응원하겠습니다.

김인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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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그때 선생님 글을 만났더라면 좀더 빨리 우울감에서 헤어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글 내용이 너무 좋아 응원합니다. 사소한 관계의 행복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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