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아버지로부터 꾸준하게 가정폭력을 당해 온 20대 초반 남성입니다. 아버지는 제가 어린 시절부터 저를 신체적으로 학대했습니다. 평생 폭력적이고 거친 언행을 보이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저를 낳아 준 아버지고, 상황을 바꿀 수도 없으니 받아들이려고 노력합니다. 

아직 대학생이고 경제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있어서 독립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버지와 대화로 푸는 것은 큰 의미도 없고, 효과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제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바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저 하나 참고 견디면 집이 평온할 수 있으니 참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반복되는 폭력으로 힘들어서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는데, 의사 선생님은 저에게 경찰에 신고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언입니다. 아버지라고 원해서 그런 성격으로 태어난 것도 아닐 테고, 아버지 역시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까지만 졸업하고 공부를 하지 못하셨는데 그런 영향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남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어울리는 법도 몰라서 친구들 사이에서나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따돌림을 당하셨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아버지가 안쓰럽고 불쌍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잘해 드려야겠다 싶다가도 막상 또다시 폭행이 시작되면 울분이 솟구쳐 오릅니다. 이제 성인이고 체격이나 힘으로도 밀리지 않으니 마음을 먹으면 아버지께 맞설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를 이길 수도 없고, 똑같이 때릴 수도 없으니 그저 맞고만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할 수 있을까 속으로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매일같이 듭니다. 이러면 안 된다고 머릿속에서는 생각하지만 제 마음을 저도 통제할 수 없고 점점 피폐해져 갑니다. 

아버지에게 맞았던 순간들이 자꾸 떠올라서 눈물이 나고 힘듭니다. 아버지를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조언을 구합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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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올려 주신 사연 잘 읽어 보았습니다. 오랜 기간 계속된 아버지의 폭력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치셨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 분노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연민과 안쓰러움, 애정으로 혼란스럽고 힘드셨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해 보려고 애쓰는 노력과 가정의 평화를 위해 희생했던 사연자님의 마음이 대견하고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학대당한 경우 많은 사람이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는 합니다. 특히 가해 주체가 부모나 가까운 주양육자, 신뢰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아동은 성인과 달리 아직 정체감이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시기이고, 부모가 자신이 경험하는 세상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주며 사랑해 주어야 할 부모가 자신을 괴롭히거나 폭력을 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면에 나쁜 의도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욱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모는 ‘좋은 사람’이어야 하는데 ‘나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인지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는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나쁜 아이라거나, 잘못된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사연자님의 경우 다행히 이렇게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로 내사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대신 아버지의 어린 시절 학대 경험과 교육 부족, 괴롭힘 가능성을 통해 인지 부조화를 해결하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폭력을 타당화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 역시 폭력의 희생자였고 고통받았으며, 상처가 제대로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하지 않지만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사연자님에게 폭력을 행해 왔다고 말입니다. 또,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으니 가정폭력의 부당함과 위험성, 가족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잘 알지 못하고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아버지를 이해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사연자님이 모르는 괴롭힘과 같은 수많은 인생의 굴곡들을 겪으며 결국은 ‘폭력을 쓸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내용은 아버지의 삶과 폭력에 대한 서사(narrative)를 형성하며 폭력성의 기원과 합리성에 대한 설명을 제시합니다. 

이렇게 사연자님이 아버지를 이해해 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아버지를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연자님의 말씀처럼 아버지 역시 과거 폭력의 희생자였고,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폭력성이 내재화되어 답습하는 양상을 보였을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공격자와의 동일시’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가해자를 거부하거나 저항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좌절과 절망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를 이상화하면서 만족시키기 위해 복종하고, 후에는 가해자가 가졌던 폭력성과 힘을 행사하며 유능감과 만족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연자님의 아버지 역시 이런 공격자와의 동일시 과정을 겪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연자님의 아버지가 겪은 과거의 학대와 그로 인한 트라우마는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사연자님에게 가해진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학대당하고 자신으로부터 그 이유를 찾았던 윌 헌팅(맷 데이먼)에게 숀 교수(로빈 윌리암스)가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It’s not your fault.)”라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처럼 “알아요.”라는 말을 계속하는 윌 헌팅에게 숀은 그가 진심으로 그 말을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윌 헌팅은 눈물을 터뜨리며 숀의 품에 안깁니다. 

사연자님은 어떠신가요? 본인만 참고 견디면 될 일이고, 가정의 평온함을 위해 참으면 된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낳아 준 아버지이니 사연자님에게 어떤 일을 해도 참고 받아들여야 하며, 맞서는 일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스스로 도덕률을 정해 놓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도덕률 안에서 사연자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존재일 뿐입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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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럴까요? 사연자님은 그저 아버지가 스스로 폭력을 멈출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만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을 멈추고, 이제는 그 에너지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사용해 보시기를 권유합니다. 아버지가 안쓰럽고 불쌍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분노와 미움, 원망의 감정이 드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내 감정입니다. 그것을 무조건 억압하기보다 인정하고, 폭력은 용인될 수 없는 행위임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환경적, 행동적 변화를 시도해 보셨으면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폭력은 몸과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깁니다. 이는 무기력, 공포, 두려움, 몸이 얼어 버리고 기억이 나지 않는 것 등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혹은 더 안전한 곳, 좋은 환경을 선택할 수 있을 때도 폭력 상황에 머무르고자 하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가정폭력처럼 의도적이고 반복적으로 오랜 기간 경험하는 외상의 경우 ‘복합 트라우마(complex trauma)’ 증상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사연만으로는 현재 사연자님이 복합 트라우마 증상을 보이는지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트라우마적인 경험을 다루고 치료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작은 바로 ‘안전한 환경’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아직 대학생이고 아버지께 경제적 도움을 받고 있어서 독립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물리적으로 아버지와 접촉하는 시간을 줄이고 가능하다면 집 이외에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도 방법입니다. 친구의 자취집이나 학교 동아리방, 집 근처 카페 등 몸과 마음이 긴장을 풀고 안전함을 느끼는 장소를 찾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여건이 되는 대로 독립하셔서 아버지로부터 물리적으로 분리된 안전한 환경에 머무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또, 아버지가 폭력을 가할 때 막으려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합니다. 사연자님이 더 이상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가 아니며, 폭력을 묵인하지 않겠다는 것을 아버지께 언어적, 행동적으로 분명히 표현해야 합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연자님이 아버지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고 명확하게 거부 의사를 밝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폭력이 심각해서 혼자 해결이 어렵다면 신고 등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는 아버지를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연자님과 가족들의 안전을 지키는 행동입니다. 

아버지의 과거가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폭력을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감수해 온 사연자님의 과거와 현재가 더 이상 미래형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변화를 시작하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석사,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 자문위원
보건복지부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 위원
한국산림치유포럼 이사, 숲 치유 프로그램 연구위원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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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의 글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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