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박혜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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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있습니다. 이 소녀는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할머니로부터 자주 매를 맞았습니다. 소녀에게 가장 아프게 기억되는 그날의 일은 어느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에 벌어졌습니다. 가족들과 예배를 드리러 가기 직전, 할머니는 소녀에게 우물가에 가서 물을 길어 오라고 시켰습니다. 소녀는 여느  또래의 아이처럼 그저 잠시 장난이 치고 싶어졌습니다.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휘휘 저어 봤습니다. 마침 이 모습을 보게 된 할머니로부터 사정없이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너무 많이 맞아 살갗에서는 피가 흘렀고, 교회에 가기 위해 차려입었던 하얀 원피스에는 핏빛 얼룩이 번졌습니다. 소녀에게는 이렇듯 너무도 사소하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로 인해 할머니께 매를 맞는 일이 일상이었습니다. 매를 맞다가 너무 힘들어 비틀거리고 있으면 할머니가 다가와 소녀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못마땅한 표정은 뭐지? 좀 웃었으면 좋겠구나.”

 

이 가슴 아픈 이야기의 주인공인 소녀는, 미국 토크쇼 프로그램인 <오프라 윈프리 쇼>를 25년간 진행하면서 세계 유명 인사 반열에 오른 오프라 윈프리Oprah G. Winfrey의 불우했던 유년 시절의 한 회고 장면입니다. 그녀는 미국의 한 시골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을 때부터 생계를 꾸려야 했던 어머니와 떨어져 외할머니 손에 키워졌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체벌을 일삼았습니다. 

이후 성인이 된 오프라 윈프리는 힘들었던 과거 시간에 대해, “이후 40년간 깊이 뿌리내린 트라우마가 제가 살면서 맺은 모든 관계와 상호작용, 제가 내린 결정들을 지배했지요.”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어린 시절 조부모로부터 당한 학대와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인간적이고 뛰어난 공감 능력을 지닌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해 가정폭력 트라우마 생존자는 물론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귀감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트라우마가 되는 생애 경험이나 사건들이란, 대개 어린 시절의 학대나 가정폭력, 대형 교통사고에 노출된 경험, 전쟁에서의 죽음이나 살상 목격처럼 몹시 나쁜 사건이나 치명적인 경험만 해당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평범한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갖고 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을 거라고도 말이죠. 그러나 2019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 성인 중 ‘부정적 아동기 경험’을 하나라도 갖고 있다고 답한 비율이 60%, 최소 세 가지 이상 가지고 있다고 답한 이들이 약 25%에 달할 만큼,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남긴 경험을 한 확률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경험들이 우리에게 트라우마를 남기는 걸까요? 사실 오랫동안 학계에서는 이 ‘트라우마(trauma)’를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정의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트라우마를 남길 만한 ‘나쁜 사건’이나 ‘치명적 경험’이 그것을 겪게 되는 사람에 따라 무척이나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폭력이나 학대, 전쟁과 같이 누가 봐도 인간의 정신에 큰 충격과 공포를 가져올 만한 사건들 외에 일상에서 개개인에게 트라우마를 남길 만한 사건이나 경험들은 자칫 간과되기 쉽고, 정의하거나 일반화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대낮에 대로변에서 흉기를 든 강도와 그를 체포하려는 형사 간에 대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길을 지나가던 시민들이 이 장면을 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장면을 목격한 한 무리의 중학교 남학생들은 현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이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마 손을 잡고 가던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는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죠. 이전까지는 그야말로 안전하다고 믿었던 세상이 이날 이후 부터 무섭고 혼란스럽게 여겨졌습니다. 

이 사례는 강도와 형사 간의 위험한 대치 상황을 똑같이 목격하고도 사람에 따라 트라우마로 남거나, 남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즉, 같은 사건이라도 각 개인에 따라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그 사람의 내면에서 그 자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하는가, 그의 스트레스 반응 강도나 형태, 패턴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죠. 이처럼 어떤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쉽사리 답하기 어려우며,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단, 트라우마에 있어서 핵심적인 세 가지 요소, 즉 사건(event), 경험(experience), 영향(effects)의 복합적 측면이 잘 고려되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의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트라우마와 같은 역경을 겪게 되는 경우, 가족이나 공동체, 지지 집단과 같이 연결성이 높을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트라우마나 역경을 좀 더 잘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트라우마를 겪은 연령대가 더 어릴수록, 연결성이 낮을수록 트라우마로 인해 발생한 부정적 영향을 극복하는 데 더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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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 정신의학 및 행동과학과 브루스 D. 페리Bruce D. Perry 교수는 오랫동안 학대나 방임, 트라우마가 발달 중인 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연구해 왔습니다. 페리 교수는 많은 연구와 임상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트라우마를 남기는 일은 외현적으로도 확연하게 드러나는 큰 사건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모욕이나 수치심을 주는 행위를 반복하는 정서적 학대나 소수 집단의 어린이가 집단 안에서 겪게 되는 소외 경험 등 우리 주변에서 두드러지지 않고 은밀히 행해지는 일들에서도 빈번히 트라우마를 겪고, 이런 일들이 우리 뇌와 몸에 장기적으로 트라우마의 영향을 드리울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이 같은 일들을 경험하는 당사자의 유전적 특성과 가족, 공동체와의 연결성,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의 민감성 정도에 따라 개인이 체감하거나 받게 될 영향력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범위가 넓어지고 다변화된 사회 속에서 현대인들은 그만큼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을 살아갑니다. 어쩌면 부지불식간에 나에게 트라우마를 드리울지 모를 지뢰밭을 피하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트라우마라는 정신적 외상을 입지 않기 위해 애쓰는 만큼, 행여 나로 인해 누군가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지는 않았는지 늘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도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트라우마의 생존자로서 조각난 마음의 잔해들을 모으며 아파하는 사람을 알고 있다면, 함께 부서진 마음의 조각을 찾는 데 슬쩍 손 하나 보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 손 하나하나가 모여 트라우마를 겪은 분들의 상처에 새살이 돋고, 오프라 윈프리처럼 자신과 같이 아팠던 분들의 성장을 돕는 큰 나무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당산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박혜인 원장

 

박혜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의학과, 연세대대학원 석사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수료
국립정신건강센터 국가트라우마센터 전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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