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림 평온 정신과, 전형진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24살 휴학생입니다.

어릴 때부터 알코올 중독이 있는 사람처럼 매일(어쩌다가 약 먹는 날, 주사 맞은 날 빼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먹는 아빠한테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다만 술을 마셨다 하더라도 본인이 기분이 좋으면 술을 즐기다 잠들었고, 직접적으로 폭행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겪은 건

1. 부부싸움과 아빠의 일방적인 엄마에 대한 욕설, 때리려는 자세를 보고 들었고, 엄마가 아빠의 말을 반박하려 하면 욕설은 더 심해졌습니다.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아빠가 엄마를 밀어서 엄마의 눈이 벽에 부딪혀 멍이 들었던 일, 엄마가 앉아있는 소파에 과도를 던져 소파에 박히게 한 일입니다.

2. 부부싸움 혹은 제가 아빠의 말에 말대꾸를 하는 등의 반박을 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는데, 본인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면 집안에 있는 TV, 서랍, 의자 등을 던지거나, 손으로 화장실 문을 부수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리고 저한테는 병x년, 미x년 등의 욕을 했습니다.

3. 저는 위와 같은 일이 있으면 초등학생 때는 아빠를 말리려고 했으나, 중학생 정도가 되면서부터 본인에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죄송하다 잘못했다며 빌라는 요구가 시작되었고 저는 자존심 때문에 그러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방에 들어가 방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고 대부분 물건이 부수어지는 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평소와 같이 방문을 잠그고 방에 숨어있던 날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분노가 더 치밀어 올랐는지 잠긴 제 방문을 힘으로 열고 들어오려 하길래 저도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했습니다. 이 문이 열리면 진짜 사람이 맞아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요.

계속 막고 있는데 "문 다 부수기 전에 열어라"라는 말을 듣는데 숨이 막히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울면서 호흡이 거칠어지며 아빠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결국 방문을 열었습니다.

저는 다시 화장실로 숨었는데 헛구역질이 나오고 여전히 숨쉬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때 이웃이 신고한 경찰이 오더라고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폭행 흔적이 없으니 소음주의만 하고 돌아갔지만요.

 

모두 시간이 꽤나 흐른 일이고 그 당시에는 며칠 지나면 별일 없는 것처럼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르면 과거로 묻어둘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근데 몇 개월 전부터 제가 위에서 구체적으로 사례를 든 일들이 불쑥 떠오르면서 숨이 거칠어지고 가슴이 조여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일들이 컬러로 재현되어서 미칠 것 같아요.

칼이 계속 소파로 날아가고 엄마 눈은 멍들어있고 저는 방문을 필사적으로 막고 화장실에서 변기 잡고 있는 제모습이 반복적으로 떠오릅니다.

가끔 꿈에서는 아빠가 저를 죽이려고 쫓아오고 결국 따라 잡혀서 목이 졸리다가 잠에서 깨버려요(실제로 이런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술 취한 성인 남성을 보면 저한테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무섭고, 작은 소리에도 크게 놀랍니다.

 

술만 없으면 평화로운 가정이고 취업할 때까지 경제적 지원도 계속 받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더 인지부조화가 생기는 것 같아요.

분명 제 기억 속에는 즐거웠던 기억보다 저런 끔찍한 장면들만 있는데 겉으로는 평화로워요.

저 기억들을 없애려면 앞으로도 얼굴을 아예 안 보고 사는 게 나은 것 같은데 취업할 때까지는 참아야 하고, 그리고 취업 이후라도

지금까지 받아온 지원 때문에 연을 끊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진_freepik
사진_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신림 평온 정신과 전형진입니다.

사연에서 아버지의 폭력적인 모습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계신 상황으로 보입니다.

아버지의 폭력적인 행동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강렬한 기억이었다면 그러한 기억들이 트라우마로 남게 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들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상황, 유사한 상황에서 피하는 경향, 쉽게 놀라는 등의 증상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흔히 보이는 장면들입니다. 보통 이러한 경우에 생각과 기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일상생활을 어렵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연을 주신 분이 평상시에는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걱정되고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사연에서 나오는 감정적인 반응들은 방치되었을 때 다른 어려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 것들입니다. 어린 시절 내가 경험했던 상황들에서 느꼈던 슬픔, 분노, 두려움 등은 해소되지 않고 억눌려있을 가능성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감정들이 해소되지 않고 남아있다면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방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기억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피하지 않고 마주하면서 기억에 관한 왜곡된 감정이나 생각을 바로잡으면서 견디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쉽지 않고 많은 감정적인 어려움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안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억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부정적인 감정들과 사고를 혼자 힘으로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지지해주고 안정감을 줄 치료자가 필요하고, 안정감을 빨리 회복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조언을 받기 위해 정신건강의학과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버지와 멀어지는 선택을 하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든 도움이 되는 것은 맞겠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면 그러기도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 어떤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내가 안정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 나중에 고민을 하셔도 될 문제로 보입니다.

학대와 관련된 기억을 극복하는 과정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지면으로 언급드릴 수 있는 부분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쪼록 적절한 도움을 통해 어려움을 벗어나 평안하게 일상을 누리는 시간이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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