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림 평온 정신과, 전형진 전문의] 

 

사연)

저는 학창 시절에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습니다. 

대입 결과가 그리 나쁘진 않았지만,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재수를 결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수를 하다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나머지, 심한 우울증이 제게 생겼습니다. (당장 병원에 가야 할 정도로 심한 수준. 제가 원래 좀 불안•걱정이 많은 성격에, 심약하고 예민한 편입니다. 그래서 재수의 압박감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재수 실패 전까지만 해도 자신감이 넘치고 자존감도 높은 사람이었는데, 재수를 우울증 때문에 망치고 원치 않는 대학의 원치 않는 과에 진학하게 되니 저의 자신감과 자존감은 완전히 바닥을 치게 되었습니다. 심한 우울증으로 2년을 거의 폐인처럼 생활을 하다가 (정말 억지로 억지로 대학생활을 했습니다. 물론 성적•대인관계 등 모든 게 엉망이었죠...) 도저히 더 이상 못 견딜 것 같아서 정신과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겪고 나니, 솔직히 제가 재수를 망치고 간 대학도 그렇게 나쁜 학교가 아닌데도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저는 '내 인생은 내가 우울증에 걸려서 재수를 망치는 바람에, 완전히 망했다. 이제 나에겐 죽는 길밖에 없다. 원치 않는 학교•원치 않는 과에서 성적도 쓰레기 같이 받았으니 내 인생은 이제 완전히 끝났다.'라고 극단적으로 생각하며 숨 쉬듯 죽음을 바랐습니다. 

그 후에 어찌어찌 겨우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본가에서 부모님과의 생활 덕분에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우울증도 이젠 적당히 가벼운 수준으로 좋아지긴 했습니다. (병증은 가벼워졌지만 사고방식은 예전과 비슷) 그렇지만 재수 실패 트라우마가 아직도 저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아 너무 괴롭습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입니다. (사실 이건 원래 제 최우선의 꿈이 아니었고(그냥 차선), 솔직히 내가 내 인생을 말아먹었기 때문에 이 시험을 준비하게 된 것이란 생각이 조금 듭니다.) 다행히 공부하는 것 자체엔 지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몇 년을 해도 공무원 시험이 잘 안 된다면, 자살을 고려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가끔씩 ‘왜 나는 재수 기간이라는 아주 중요한 때에 우울증에 걸려서, 내 인생을 말아먹었을까?’, ‘남들은 우울증 같은 것도 안 걸리고, 잘만 재수에 성공하는데 나만 왜 이렇게 운도 없고 불행한 걸까?’, ‘이미 다 망한 인생인데 여기서 노력한다고 뭐가 더 달라질까? 이미 완전히 끝장났는데.’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이 들다 보니 나 자신이 너무 밉게 느껴지고요. 그래서 나 자신을 둔기로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팬다든가, 칼로 나 자신을 난도질하고 싶다든가, 머리를 딱딱한 벽에 세게 연속적으로 박고 싶다든지 등, 공격적인 생각이 제법 듭니다. 

제 마음속엔 ‘열심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서 잘 되고 싶은 생각’과 ‘인간쓰레기인 나를 완전히 박살 내 죽이고 싶은 생각’이 공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고, 나 자신을 죽이고 (또는 벌주고) 싶다는 생각이 좀 듭니다. 저 정말 어쩌면 좋을까요? 

 

사진_freepik
사진_freepik

 

답변)

힘든 상황에도 학업을 지속하면서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부분이 보입니다. 

괜찮은 학교에 진학해서 일정 수준의 직장을 가지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서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상황은 성취와 관련하여 내가 가진 생각들이 극단적인 면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생을 돌아보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들은 얼마든지 많겠지만, 학업 혹은 직업적인 성과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모습들은 많은 어려움을 만들어 냅니다. 다른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들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성취 여부에 따라 기본적인 안정감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원하는 결과를 내는데 집착하게 되고, 불안감이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남들보다 쉽게 자책하고, 불안과 우울에 쉽게 빠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이 이전에 언급하신 우울증이 어느 정도로 남아있는지 확인하는 부분일 것 같습니다. 

재수 실패나 수험 실패가 극단적인 생각으로 이어지는 문제들은 우울감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을 때 흔히 나타나는 부정적인 사고 패턴들이기 때문입니다. 우울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상황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부정적인 생각이 극대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대해 떠올리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울한 사람들은 더 부정적인 과거를 떠올리고, 이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도 우울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큰 경향이 있어, 이러한 문제들이 실제로 공부를 하는데 방해가 되고, 또 다른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성공이나 성과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으로 인해 우울감을 겪게 되고, 우울감으로 인해 부정적인 생각이나 극단적인 과거 회상으로 이어지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성과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하고 처벌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내가 살아온 과거 경험이나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는 관계에서 형성됩니다. 우울증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이유는 우울감을 돌보는 과정에서 나를 좀 더 너그럽게 바라보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내 인생에서 부정적인 상황들은 인생에서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은 크고 작은 어려움들로 구성되는 것이지, 실패나 어려움 없이 완벽하게 이어지는 과정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 실패나 좌절을 겪더라도 인생이 절망적으로 흘러간다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 이후에 다가올 상황들이 얼마든지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며, 나중에 가서는 내가 힘들었던 시기가 점처럼 작게 느껴지는 순간을 마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연을 주신 분에게 더 중요한 것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괴로워하면서 앞으로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보다 지금 해야 할 일을 잘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한 우울감이 심해지면 혼자서 상황을 이겨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다시 약물치료를 시작하거나 적절한 상담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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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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