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두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드라마  '더 글로리' 포스터
사진_ 드라마 '더 글로리' 포스터

 

드라마 <더 글로리>의 주인공은 학교 폭력의 피해자입니다. 폭력을 견디지 못해 자퇴를 해야만 했던 고등학교 2학년 소녀는 서른여섯이 되어 십수 년 전 자신을 괴롭혔던 가해자들 앞에 나타납니다. 그녀는 더 이상 연약한 소녀가 아닙니다. 치밀한 준비로 가해자들의 약점을 간파하고, 열심히 모은 돈과 안정적 직업을 무기로 천천히 복수를 진행합니다. 시청자들은 가해자들의 끔찍한 모습에 화와 혐오를 느끼다 그녀의 복수에 통쾌해집니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세상과 마찬가지입니다. 거친 세상에 나가기 전에 읽고 쓰고 셈하는 것을 배우면서 동시에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웁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육체적으로 힘이 세거나 친구들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 센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힘의 크기와 상관없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사람과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도 알게 됩니다. 이런 특성들은 양 극단은 소수이고, 대부분은 중간에 존재합니다. 이것들을 자연스럽게 익히면서 어른이 됩니다. 어떨 때는 친절했던 친구가 성질을 부리는 때도 있으니, 그날은 조심하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말이죠. 

 

제 초등학교 시절에도 무서운 소문들에 아이들은 겁을 먹었습니다. 중학교쯤 되면 덩치도 커진 사춘기 아이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다 실제로 싸움이 나기도 합니다. 저는 힘이 약한 편이어서 공부를 잘하면 잘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 눈치를 잘 보면 피해를 덜 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환경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지만 여전히 내담자들 중에 학교 폭력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싼 학군으로 이사를 가고 싶다는 지인으로부터 "모두가 공부하느라 정신없는 환경에서 폭력이 덜 발생할 것 같아서"라는 근거 없는 가정을 듣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프고 다치는 것이 두렵습니다. 어쩌다 다쳤을 때는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겠지만, 누군가 나를 고의로 해하고 반복할 예정이라면 극심한 공포에 휘말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어두운 뒷골목도 아닌 얼굴을 아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학교라면 무기력해집니다. 마땅히 나를 보호해야 하는 선생님께 도움을 청해도 오히려 내 탓을 한다면 억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친구나 가족마저 내 옆에 있어 주지 않는다면 작은 희망마저 사라집니다. 

그래서 동은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유일하게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복수심이 되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살아 주어 다행입니다. 긴 시간 동안 복수를 준비하며 목표에 다가가는 성취감이 유일한 긍정적인 감정이었을지 모릅니다. 좋아했던 건축을 배워 보거나, 여러 친구를 사귀고, 달달한 연애를 하거나, 화목한 가족을 만드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크고 작은 사건의 피해자들은 다양한 심리적인 변화를 겪습니다. 세상이 권선징악의 동화책과 똑같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어쩌다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 당황하게 됩니다. 쉽게 상의하고 도와줄 가족이나 친구가 있으면 좋은데 그렇지 못한 경우 괜히 더 곤란해질까 위축됩니다. 좋지 않은 이야기가 돌아서 외톨이가 되면 어쩌나 두렵습니다. 문제가 끝나지 않으면 다른 일상도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삶의 터전을 떠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게 됩니다. 

다행히 가해자들이 책임을 지게 될 때도 피해자의 마음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피해자의 삶에 큰 변화가 생깁니다. 가해자는 1의 피해를 입혔는데 긴 시간 동안 큰 이자가 붙어 10의 피해가 발생합니다. 피해자는 자신의 무너진 삶을 가해자로부터 온전히 보상받고 싶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모든 범죄를 사형으로 벌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화재 훈련을 하듯 폭력에 대해 훈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보호할 힘을 키우는 것도 방법입니다. 완력이 부족하면 증거물을 잘 남겨 상대의 약점을 만드는 것도 배울 수 있습니다. 가장 도움이 될 사람을 찾는 기술도 좋습니다. 그런데 가장 빠르고 강한 방법은 서로 돕는 것입니다. 동은도 자신 앞의 피해자를 돕지 못했고, 동은의 친구도 동은을 돕지 못하면서 가해자들이 활개를 쳤습니다. 도울 때는 도움을 받는 사람이 완벽한 자격을 가졌는지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동은을 도울 때 그녀 또한 다른 피해자를 돕지 않은 잘못이 있다는 생각은 잠시 미뤄둬야 합니다. 완전무결한 피해자는 없으니까요.

 

사진_ 드라마 '더 글로리' 포스터
사진_ 드라마 '더 글로리' 포스터

 

가해자들을 응징하면서 동은은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부모나 선생님에게도 받지 못한 도움을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받게 되면서 인간에게 닫혔던 마음도 조금 열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화려한 복수를 준비하느라 친구나 연인을 만들지 못하고, 직업부터 취미까지 모두 복수를 위한 준비였던 것이 그녀의 원래 삶을 잃게 만든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사회체계의 도움을 받아 빠르고 ‘적당한 복수’를 하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 개인에게는 더 나은 삶일 것입니다.

주인공은 엄마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취약한 개인이지만, 가해자들은 강한 권력을 가진 무리들입니다. 그렇다면 권력이 있다면 언제나 안전할까요. 드라마에서도 병원장이 환자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상상 속의 일이 아니라 저 또한 주위에서 겪었던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완전히 안전하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도 자신과 상관없는 전쟁에서 아까운 목숨을 잃으니까요. 서로가 서로를 돕는 환경에서 우리는 조금 더 편안해지고 삶에서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해자가 적절한 책임을 지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다시 사회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모두 필요합니다. 가해자가 능력이 좋아 그 자체로 사회에 공헌할 가능성이 있으니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태도는 나중에 더 큰 문제를 만들어 가해자의 삶도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학교의 상과 벌을 정하는 자리에서 교육자들은 상을 정할 때보다 벌을 정할 때 마음이 힘들다고 합니다. 아기가 불이나 전기로 장난을 칠 때 어른들은 아기가 울더라도 혼을 내야 결과적으로 아기를 보호하는 것처럼, 모두를 위해 적절한 책임을 지게 하는 사회체계가 필요합니다.

 

정두영 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

 

- 본 칼럼의 일부는 경상일보 2023년 1월 27일 15면 ‘복수심이 삶의 전부가 될 때 : 더글로리 문동은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정두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
저서 <마음은 단단하게 인생은 유연하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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