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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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지금 이 단어를 듣는 순간,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평화주의자인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분도, 한때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던 테마였다고 회고하는 분도, 아직 현재 진행형으로 여전히 날카로운 복수의 칼날을 갈고 계신 분도 있으실 겁니다. 

한평생 끓어오르는 분노나 이글이글 타오르는 복수심으로 가득 차서 오로지 복수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분들은 별로 없으시리라 짐작됩니다. 그러나 누구든 인생의 어느 한 지점에서는 나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처참히 짓밟은 그에게 당한 만큼 갚아 주고 싶은, 앙갚음에 대한 욕구가 꿈틀대는 감정, 한 번쯤 느껴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이러한 복수심을 현실로 가져와 실행으로 옮기신 분들은 많지 않을 테지만 말이죠.

우리는 흔히 ‘복수’란 초등학교 남학생들이나 하는 유치한 행위 정도로 인식하곤 합니다. 그리고 혹자는 복수를 헛된 것, 종교에서는 해악으로 치부하기도 하고요. 또한 세상의 수많은 법과 도덕률, 종교 교리들은 용서와 화해를 미덕으로 여기며 상처받은 영혼에게 뜨거운 분노 감정을 내려놓고 냉정한 이성을 되찾으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며 그만 회개할 것을 종용하기도 하죠. 우리의 분노 감정은 도무지 식을 줄 모르고 여전히 뜨겁기만 한데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복수가 정말 하등 쓸모없는 해악일 뿐인 것인지 의문도 듭니다. 잘 생각해 보면 복수에도 분명 순기능이 존재합니다. 복수는 불평등과 부정, 억압과 폭력에 맞서 항거하는 인간의 본능이자 가장 솔직한 감정이며, 결코 불의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인류의 역사 자체가 피로 물들인 처절한 복수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국가가 세워지고 문명이 발달하기 전인 수렵과 채집의 시대에, 보복은 집단의 안위를 위협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가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착과 농경 생활로 말미암아 집단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과 반목이 심화되고,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인간들 사이의 응징은 사회를 더 큰 혼란에 빠트리고 맙니다. 혼란에 빠진 사회를 더 이상 수수방관만 할 수 없던 국가는 도덕과 종교적 신념을 등에 업고, 법과 질서를 앞세워 개개인의 국민들을 대신해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복수의 권리가 국가에 이양된 셈입니다. 

그러나 그 옛날 국가가 수립된 이래로 오늘날까지 국가는 과연 개개인의 국민들을 대신해 정의를 실현하고, 타인에게 손해를 끼친 자들에게 공정한 잣대를 들이대어 법의 심판을 받게 했을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껏 그 약속이 잘 지켜졌다면, 하루가 멀다 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국민이 이토록 많지는 않을 듯합니다.

1901년 이란의 수사 유적지를 발굴하던 탐사단은 높이 2미터 이상, 무게가 4톤에 달하는 돌기둥을 발굴해 냈습니다. 이 돌기둥에는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약 3000년간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고대 오리엔트에서 사용된 설형문자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는데요, 돌기둥을 발굴한 지 일 년여 만에 이 비문에 새겨진 문자를 판독한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바빌로니아 왕조 함무라비 왕 때의 법전으로 총 282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요, 이 법전에는 형법에서부터 군법, 상법과 가족법, 사유재산권과 이혼에 관련된 것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조항은 빠짐없이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특정 범죄에 대한 동해보복법, 일명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인 보복과 관련된 법 조항이었습니다. 언뜻 보면 이 법 조항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국가가 개인을 대신해 정의 구현을 가능하게 할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바빌로니아 왕국은 엄연한 계급사회였기에 만약 귀족 남성이 같은 계급인 귀족의 눈을 멀게 했다면 자신의 눈도 내놓아야 했지만, 평민의 눈을 멀게 한 경우에는 고작 은 60세겔만 내면 그만이었던 것이죠. 공정한 법의 심판은 예나 지금이나 먼 나라 이야기, 있는 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인가 봅니다.

 

사진_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스틸 컷
사진_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스틸 컷

이처럼 현실 세계에서는 쉽게 실현되기 힘든 정의 구현과 개인의 복수에 대한 열망은 과거부터 현대에 걸쳐 문학, 연극,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며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도 인간 심연에 도사리고 있는 복수의 욕망을 일깨웁니다. 돈이 곧 권력인 세상에서, 아니 권력보다 더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돈의 위력 앞에서 주인공 진도준(송중기 역)은 자신을 포함해 사랑하는 가족(어머니)의 목숨까지 속절없이 희생당하고 맙니다. 재벌가의 비서로 일하다가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된 진도준. 죽음도 막아설 수 없었던 그의 깊은 원한은 그가 다시 재벌가의 막내아들로 환생하면서 복수의 서막을 알려 오죠. 현실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환생’ 판타지 형식을 빌려서라도 주인공이 꼭 하고 싶었던 것은 가슴 절절한 로맨스나 돈과 명예를 움켜쥐고 떵떵거리는 것이 아닌 바로 ‘복수’라는 점에서, 인간의 삶에서 과연 ‘복수’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먼저 복수하는 사람의 마음 상태는 어떨지 한번 떠올려 봅니다. 복수를 결심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마음속에는 깊은 분노가 자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너무 뜨거워서 원수도 모자라 자신까지 태워 버릴 것만 같은 이 분노의 감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되는 걸까요?

분노를 유발하는 상황이나 감정은 무척이나 다양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직접 힘과 권력의 희생자가 되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메꿀 수 없는 빈부격차로 인해 심한 박탈감을 느끼거나, 누군가의 의도 혹은 실수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좌절하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았다고 깨닫는 순간, 사람들은 깊은 분노감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 감정이 너무나 뜨겁고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때, 어떤 이들은 복수를 결심합니다. 세상의 많은 증오 범죄가 이런 감정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복수의 결말은 대부분 비극적이며 참혹합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감과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십분 이해가 가지만,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인간 사회는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신이 아닌 인간이 우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처럼 원수를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베이컨의 말처럼 복수하면 적과 같은 수준이 되지만, 무시하면 적보다 우월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단지 적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복수를 순순히 접는다는 건 왠지 썩 내키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복수의 감정이 나에게 매우 고통스럽기에, 어떻게 하면 그 뜨거운 불덩이의 열기를 식힐 수 있을지 고민해 보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이고 인간적으로 다가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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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복수’를 주제로 하는 다양한 장르의 많은 콘텐츠들이 있습니다. 영화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킬 빌>, <복수는 나의 것>,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 호메르스 서사시 <일리아스>,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재벌집 막내아들> 등등. 혹 불타오르는 복수심에 잠 못 이루는 분이 있다면 이런 픽션 서사물을 통해 대리 만족감을 느끼며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으셨으면 합니다. 그래도 정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면 킥복싱처럼 격렬한 운동이나 마음껏 펀치를 날릴 수 있는 대상을 정해 분노 감정을 발산해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행여 당한 자신이 바보 같다거나,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분은 없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충분히 아프고 힘들었을 자신에게 비난이 아닌 연민의 마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리고 힘든 과거의 기억에서 한 발 물러서서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의 감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렇게 말해 주세요. 

“많이 아팠지… 뜨거운 불덩이를 지고 사느라 고생 많구나, 내 마음. 언젠간 이 뜨거운 분노도 식는 날이 오겠지….”

 

그리고 한 번쯤 복수극의 주인공이 되어 가슴속에만 묻어 둔,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속 시원히 꺼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이죠.

“근데 말이야, 지금 나는 이 말을 꼭 해야겠어. 이 빌어먹을 세상아, 그렇게 불공평하게 심판할 거면 그냥 좀 꺼져 줄래? 내 복수에 끼어들지 말라고! 처음부터 복수는 내 것이었다고!”

지금 이 순간, 혹시라도 복수심에 불타 괴로운 분이 계시다면 그 뜨거운 분노가 딱 1도만이라도 식었기를 바라 봅니다.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원장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대구가톨릭대병원 의과대학 학사 , 석사
대구가톨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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