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두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월요일 아침 이상한 소리에 깼습니다. 밖에서 누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아 취침용 귀마개를 뽑았습니다. “싫어. 싫어. 아침이 이게 뭐야. 이걸 먹으란 말이야?” 아이가 쉰 목소리로 할머니에게 생떼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야채가 담긴 접시를 거부하고 잠옷 채로 식탁에 노트북을 켜서 게임을 하려고 합니다. 교과서를 읽는 것 같은 어색한 말투에 어젯밤 일이 생각났습니다. 아침을 먹여 학교에 보내려고 마음이 급해진 할머니에게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소아과에서 코로나는 아니고 감기는 심하지 않다는데 어제 엄마에게 싫으면 싫다는 얘기를 해도 된다는 소리를 듣더니 그대로 따라 하는 것 같아요.” 

조금 뒤 나갈 준비를 마친 아내가 나옵니다. 상황을 알려 줬습니다. 평소와 달리 엄마 말도 잘 듣지 않고 아예 학교를 안 가겠다고 합니다. 학교앱으로 선생님께 상황을 말씀드립니다. 감기는 많이 좋아졌는데 대학병원에서 체중 조절을 하라고 해서 짜증이 늘었다고, 학교에 갔다가 혹시 피곤하면 집으로 오라고 하겠다고 메시지를 보내 놓고는 모두에게 알려 줍니다. 할머니는 숙제도 다 해 놨고 게임도 하면서 피곤해서 학교를 못 간다는 것이 말이 되냐며 실랑이를 하다가 포기하고 나가십니다. 아내도 늦었다며 제게 부탁하고 나갑니다. 

곧 지각인데 아이는 쉽게 달래지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거부 표현도 간접적으로 “전 괜찮아요.”라고 하던 아이가 왜 갑자기 바뀌었는지 생각해 보니 짐작이 갑니다. 그 사이 담임선생님께 그렇게 하자는 답장이 온 것을 아이와 함께 보고 약속을 합니다. "집에 오면 아빠가 없을 테니 할머니 댁으로 가면 된다." 아이는 조금 누그러집니다. 어차피 지각이지만 아빠가 데려다주면 시간이 더 걸린다고 하니 혼자도 갈 수 있다며 의젓하게 나갑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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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일요일 저녁에 기차를 타는데 월요일 아침에 서울에서 도서 관련 촬영이 있어 집에서 하루 더 머무르다 보니 이 등교 광경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필 제가 알레르기로 몸이 좋지 않았던 것도 사건의 시작입니다. 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한 일정을 잡은 것도 문제인데, 아이도 감기에 걸리고, 아내는 연말까지 계속 바쁠 예정입니다. 얼마 전에 소아내분비과에서 체중 조절 권고를 받은 것도 추가됩니다. 그러다 부부 갈등도 생기고, 아이에게도 영향을 준 것입니다.

아내는 토요일에 집을 비웠고, 저는 거부적인 아이에게 점심에 치킨을 사 주겠다며 소아과를 데려갔습니다. 당장은 감기가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죠. 일요일은 아내가 집에 있었지만 함께 시간을 보낼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았나 봅니다. 아침에는 제가 샐러드를 먹이고, 아이와 함께 가는 테니스 레슨은 감기라 빠지고 싶다고 해서 혼자 다녀왔습니다. 아빠와 점심을 먹겠다고 아이가 기다렸다는데 엄마와 실랑이가 시작됩니다. 샐러드 말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아이와 건강을 위해 필요하다며 간헐적 단식부터 칼로리 조절 식단까지 선택지를 내놓는 엄마와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점심을 안 먹고 저녁을 맛있는 것으로 먹겠다는 협상까지 들려옵니다. 엄마는 샐러드만 놓고 사라지고, 아이는 샐러드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남겨진 샐러드는 제가 먹습니다.

 

늦은 오후가 되자 아이는 허락을 받았다며 피자를 시켜 달라고 합니다. 계속 칭얼대는 아이와 둘이 있다 보니 저도 짜증이 납니다. 아내는 제가 하룻밤 더 있는지 몰랐다며 학교 숙제와 저녁 샐러드 먹이기를 제게 카톡으로 부탁합니다. 집에 있는데 몸은 괜찮은지 묻지도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제 짜증은 더 커져 아내의 방문을 노크합니다. 적어도 일요일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제 지적에 주말만 아이를 보는 남편들은 운동도 잘 챙긴다는 비교로 화답합니다. 결국 부부 싸움이 시작됩니다.

참았던 얘기들이 올라오며 결혼식 전달 제 생일 얘기까지 등장합니다. 아내가 원하는 웨딩스튜디오 예약이 그날만 가능했습니다. 힘든 촬영이 끝나자 피곤하니 각자 집으로 가자는 아내에게 속이 상했습니다. 내가 다시 부탁도 했는데 거절해서 서운했다고 얘기했습니다. 아내는 얼마 뒤 자신의 생일 얘기를 하며 자신은 그 상황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집에 일찍 오냐고 물었는데 제가 늦게 온다고 했고, 각자 바쁘니 별일 아니라고 자신도 넘어갔던 것이라고요. 저는 긴 세월을 거쳐 아내가 생일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제가 혹시 아내 생일을 잊었던 것은 아닐까 미안한 마음도 들어 할 말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서로를 좀 더 이해하게 되며 부부상담도 잘 받아왔기에 이날 갈등은 점차 사그라졌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의 차가운 분위기에 신경이 쓰이는지 불안해 보입니다. 아이에게도 엄마, 아빠가 화해하고 있다는 얘기를 해 줍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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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해답은 이 장면이었습니다. 아내는 저나 아이가 잘 참는 것은 좋지만 상대에게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점을 알려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점심에 속상했냐고 하자 눈물을 글썽이며 끄덕이는 아이에게 “엄마, 점심이 이게 뭐야. 이걸 먹으란 말이야?”라고 얘기해도 된다며 솔직하게 감정을 풀어 가자는 얘기를 한 거죠. 저는 겨우 부부 갈등을 해소한 상황에서 상대를 지적하는 방식의 감정 표현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월요일 밤 전화로 이 과정을 설명해 줍니다. 아이가 다른 상황에서 남을 비난하는 식으로 갈등 해결을 시작하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자신의 느낌을 먼저 표현하게 하자고요. 그리고 십 년 전 아내 생일은 그날이 아니었고, 정작 생일에는 전공의 시험 준비로 아침 기차를 타야 해서 미리 얘기하고 난생처음 미역국을 끓여 아침을 차려 놓고 갔는데 기억해 주지 못해 서운하다고도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충분한 사과를 받았습니다. 저도 마음이 조금 편해집니다. 그렇게 얘기해 줘서 고맙다고 저도 마음을 전합니다.

 

정두영 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 

 

- 본 칼럼의 일부는 2022년 10월 21일 경상일보 15면 ‘[정두영의 마음건강(31)]마음을 알아주려는 자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https://news.unist.ac.kr/kor/column_620/

정두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
저서 <마음은 단단하게 인생은 유연하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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