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혼으로 맺어진 부모-자녀 사이 관계 맺기

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혜영 씨는 서른세 살의 돌싱(돌아온 싱글)으로 다음 달 재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첫 결혼생활은 2년 남짓 유지하다가 남편과의 성격 차이로 5년 전에 파경을 맞게 되었는데요, 결혼생활과 이혼 과정에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던 혜영 씨였기에 ‘두 번 다시 결혼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가족과 지인들에게 못을 박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호언장담했던 일이 무색해질 만큼, 2년 전 산악 동호회에서 세호 씨를 만나면서부터 점차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2년여의 연애 끝에 재혼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는 것도 잠시, 혜영 씨는 사실 두려움과 걱정이 더욱 앞섭니다. 세호 씨에게는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그동안 자주 만나 볼 기회도 없었고, 몇 번의 만남에서조차 수줍음이 많은 아이는 혜영 씨에게 쉬이 곁을 내주지 않았던 겁니다. 혜영 씨는 아이들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았고, 직접 아이를 낳아 길러 본 경험도 없었기에 결혼 후 아이와 어떻게 지내야 좋을지 난감하기만 했습니다. 세호 씨를 놓치고 싶지 않아 스스로 선택한 결혼이었고, 주변에서는 ‘굳이 자녀가 있는 사람과 결혼해야겠느냐.’면서 말리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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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증가하는 이혼율 못지않게, 새로운 사랑을 찾아 재혼에 성공하는 분들도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2021년 통계청에 따르면, 남녀 모두의 재혼율은 12.4%를 차지할 만큼 재혼가족은 전체 혼인 형태에 있어서도 결코 작은 비율이 아닙니다. 그런데 같은 재혼가족이라도 부부 양쪽 모두 재혼인 경우, 한쪽만 재혼인 경우, 양쪽 모두 자녀가 있거나 없는 경우, 한쪽만 자녀가 있는 경우, 직접 양육을 하고 있는 경우 등 가족 구성원의 형태는 다양하게 조합될 수 있습니다.  

그중 자녀가 있는 재혼가족은 부부의 결합뿐만 아니라, 의붓자식과의 관계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데요, 하루아침에 배우자의 역할뿐만 아니라 부모의 역할이 주어지는 것은, 당사자는 물론 배우자와 그 자녀에게도 긴장되고 혼란스러운 상황일 수 있습니다. 당장 재혼으로 인해 한 가정의 새 부모라는 위치에 서게 됐지만, 서로를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재혼을 통해 법적으로 혹은 형태적으로는 한 가족이 되었지만, 마음으로 서로의 자리를 허락하고 친밀해지기까지는 잦은 오해와 갈등이 반복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많은 재혼가족들이 여러 어려움과 갈등을 겪으면서 고민이 깊어집니다. 과연 의붓자식들과 좀 더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요?

무엇보다 새 부모라는 권위를 행사하기에 앞서, 아이들과 호의적인 관계부터 맺는 것이 우선입니다.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인생에 나타난 낯선 어른에게 부모의 역할이나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어른의 권리를 내어 주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인정할 수 없는 어른의 권위는 쉽게 허락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새 부모의 권위가 재혼한 즉시 자신에게 부여될 것이라는 기대감은 일찌감치 내려놓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개방적인 태도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자녀들에게 신뢰감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새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부모의 재혼으로 인한 낯선 어른의 등장이 앞으로 이 가정 안에 어떠한 변화를 불러올지 전혀 예측하기 힘듭니다. 따라서 가능한 한 지금까지 이전 가정에서 통용되던 질서나 규칙, 습관 등에 대해서 존중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서로 간에 신뢰가 형성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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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자녀와의 신뢰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① 자녀와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도록 합니다. 불가피하게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경우에는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번에 또 약속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합니다.

② 가족 개개인의 주중 혹은 주말 스케줄을 미리 알려 주고, 가족들에게 중요한 일정은 함께 상의해서 정합니다.  

③ 가능한 한 일관된 태도로 자녀들을 대하되,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해서 처신합니다.

 

또 자녀들과 너무 급하게 친해지려 하거나 철저한 희생정신으로 무장해 다가간다면 오히려 부담감을 느끼거나 역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는 한발 물러서서 함께 생활하면서 가족 개개인의 특성은 무엇인지, 어떤 습관과 행동 양식, 규칙 등이 가족 안에서 통용되는지 관찰하고 이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발 물러선다’는 것은 자녀들에게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상호 간에 어느 정도의 신뢰감과 유대감이 형성될 때까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거나 자녀들의 행동이나 습관 등을 바꾸기 위해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려 주는 것에 가깝습니다. 자녀들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호의를 베푸는 것은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합니다. 

물론 새 부모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어렵습니다. 배우자와 함께 ‘누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논의가 필요합니다. 레이첼 카츠(Rachelle Katz)는 초반에는 새 부모가 권위의 긍정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좀 더 구속력 있는 권위는 친부모가 행사하기를 권합니다. 그렇게 할 때 당장 협의가 되지 않은 부분에 대한 갈등을 피할 수 있고, 자녀 교육에 대한 방침을 서서히 합의해 나갈 수 있습니다. 부모 간에 공조된 모습을 지켜본 자녀들은 새 부모의 권위를 좀 더 잘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듯 친부모가 새 배우자를 절대적으로 믿고 지지한다는 점을 명확히 함으로써 새 부모에게는 명분이 생기고, 힘이 실리게 됩니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가정생활을 기대하면서 시작한 두 번째 결혼 생활이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거나 온갖 갈등 상황에 부딪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 중 대부분은 재혼한 당사자 개인의 문제나 잘못이 아니라, 재혼가정이라는 구조와 특수성으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문제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갈등과 문제들을 차차 해결해 나가는 것은 결국 당사자들이 감당해 나가야 할 몫일 겁니다. 부부가 포기하지 않고 산적한 문제들을 하나씩 헤쳐 나가다 보면, 그 어떤 가족보다 서로를 신뢰하고 결속력 있는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원장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대구가톨릭대병원 의과대학 학사 , 석사
대구가톨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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