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적 사랑이 끝난 후에 사랑을 지속시키는 힘

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영화 '비포 미드나잇' 스틸 컷
사진_ 영화 '비포 미드나잇' 스틸 컷

 

여기, 그리스의 아름다운 해변 마을을 거니는 두 남녀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잃어버린 삶에 대한 에너지와 열정에 대해, 이상과 현실에 대해,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던 중 그들이 일과 스케줄, 식사 메뉴처럼 일상과 현실에 국한된 이야기 외에 잡담을 나누며 느긋하게 걸었던 기억이 꽤 오래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예쁜 쌍둥이 딸들과 함께 아닌, 두 사람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점도 말이죠.

거리를 거니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이 두 남녀의 모습은 영화 ‘비포 시리즈’의 주인공인 제시와 셀린느가 세 편의 연작 중 마지막 편인 <비포 미드나잇>에서 이제는 부부가 되어 카르다밀리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장면입니다. <비포 선라이즈>의 비엔나에서 꿈에서도 잊을 수 없던 환상적인 첫 만남을 가졌던 두 사람. 비록 6개월 뒤, 약속된 기차역에서의 재회에는 실패했지만, 9년 후 작가가 된 제시가 방문한 파리의 어느 한 서점에서 그들은 다시 운명적인 만남에 성공합니다. 그로부터 다시 9년 뒤, 둘 사이에는 여느 중년 부부처럼 토끼 같은 자식을 두고, 뜨거운 열정과 설렘보다는 익숙한 편안함이 감돌게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제시의 얼굴에서 셀린느를 반하게 만들었던 빨간 수염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시는 빨간 수염이 사라진 게 아니라 하얀 수염으로 변한 것뿐이라고 말하죠. 

사실 제시와 셀린느는 그들의 여름휴가에 초대해 준 분들의 배려로 정말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이 허락된 참이었습니다. 하염없이 걷던 두 사람의 발끝이 닿은 곳은 아름다운 해변가의 카페티리아. 그곳에서 둘은 붉게 물든 저녁놀을 고요히 함께 바라봅니다. 오랫동안 잊혔던 설렘과 로맨틱한 무드가 그들을 감싸는 것도 잠시, 서로 간에 대화가 오갈수록 다시 현실적인 문제와 과거에 묵혀 뒀던 감정들이 터져 나와 서로를 향한 비수를 던지고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습니다. 

서로에게 매혹되어 첫눈에 소울메이트임을 알아봤던 제시와 셀린느. 현실이라는 벽과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뜨거웠던 그들의 사랑도 결국, 싸늘하게 식을 수밖에 없던 걸까요?

 

낭만적인 로맨스가 무르익어 커플이 만족스럽고 충만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조건에 부합하지 못할 때, 사랑하는 관계에 점점 균열이 생기고, 마음이 공허해진다고 하는데요, 진화 심리학자인 미국 예일대학교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erg) 교수는 다양한 사랑의 유형을 분석한 결과, ‘사랑의 삼각형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스턴버그 교수는 사랑을 완성시키는 기본 요소로 친밀감, 열정, 헌신의 세 가지 요소를 발견했습니다. 이때 친밀감은 사랑하는 관계에서 나타나는 정서적 측면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따뜻한 느낌을 말합니다. 그리고 열정은 동기적 측면으로 서로에게 낭만적 감정이나 신체적 매력을 느끼는 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 헌신은 사랑의 선택적 혹은 행동적 측면으로 계속해서 이 사랑을 지켜 나가겠다는 결의이자 노력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여 그 사랑이 충만하게 지속되려면 이 세 가지 요소가 꼭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한데요, 각각의 요소를 삼각형 형태로 배치했을 때, 정삼각형의 모습에 가까울수록 세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룬 이상적 사랑이 되고, 사랑하는 마음이 클수록 삼각형의 크기도 커진다고 합니다. 또한 이 세 가지 요소의 존재 유무와 조합에 따라 사랑은 각기 다른 모습을 취한다고 하네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지금 여러분의 사랑은 어떤 모습인지 점검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① 사랑 없음: 친밀감과 열정, 헌신의 요소가 모두 없는 상태

② 좋아함: 열정과 헌신은 결여된 채 친밀감만 존재하는 경우로 호감 수준을 의미합니다.

③ 도취적 사랑: 둘 사이에 오직 열정만 있고, 헌신과 친밀감이 없는 상태

④ 공허한 사랑: 상대에 대한 열정과 헌신만 있고 친밀감이 결여된 상태. 오직 헌신만 남아 있거나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상대에 대한 열정이나 친밀감이 결여된다면 관계를 활기차게 이끌어 갈 동력이 상실된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⑤ 낭만적 사랑: 친밀감과 열정은 있지만, 서로에 대한 헌신은 없는 상태. 둘 사이에 정서적, 육체적으로 밀착되어 있어 ‘달달한 사랑’은 가능하지만, 사랑에 대한 의무감이나 관계 지속 의지가 약해, 다른 한편으로는 이기적 측면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⑥ 우애적 사랑: 열정은 없고 친밀감과 헌신만이 존재합니다. 상대에 대한 이해심과 배려를 바탕으로 한 헌신은 탄탄하게 자리 잡았지만, 서로에 대한 열정이나 성적 매력이 떨어져 우정의 형태를 띱니다. 흔히 결혼한 지 오래된 부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⑦ 얼빠진 사랑: 친밀감은 없고 열정과 헌신만 강한 상태. 시간이 흐르면서 열정과 헌신이 흐릿해져 지치게 되면 관계를 지속시키기 어려워집니다.

⑧ 완전한 사랑: 친밀감과 열정, 헌신이 모두 존재하며, 이것이 균형 있게 안배되었을 때 충만하고 성숙한 사랑의 모습을 보입니다.  

 

사진_ 영화 '비포 미드나잇' 스틸 컷
사진_ 영화 '비포 미드나잇' 스틸 컷

 

물론,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하면서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도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입니다. 언제나 균형 잡힌 정삼각형 형태의 사랑을 유지하기란 더더욱 어려울 거고요.

<비포 미드나잇>의 후반부에서 셀린느는 제시와 달리 자신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희생과 헌신을 하고 있다며 불평합니다. 그러나 제시는 이를 인정하지 않죠.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해서 삐걱대고 어긋나다가 마침내 갈등이 극에 달합니다. 잠시 후, 상심과 분노에 휩싸여 홀로 카페테리아에 앉아 생각에 잠긴 셀린느에게 제시는 장난스럽게 다가옵니다. 낯선 사람과는 말하지 않는다는 그녀에게 제시는 18년 전 여름날 서로 만난 적이 있는 사이라고 둘러대죠. 그런 그를 향해 셀린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과 착각하시는 것 같네요. 참, 다정하고 로맨틱한 남자는 기억나네요.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나란 사람을 존중해 줬죠.”라고 말이죠. 제시는 계속해서 셀린느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자신이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면서 유머러스한 편지글을 낭독하며 진심을 전합니다. 그런데도 도통 마음이 동하지 않는 그녀에게 제시는 마지막 안간힘을 씁니다.

 

“당신도 어린애들이나 딴 사람들처럼 동화 속에 살고 싶은 거군. 난 지금 잘하려고 애쓰고 있어. 무조건 사랑한다고, 아름답다고. 웃게 해주고 싶어서. 근데 진정한 사랑을 원한다면 이게 맞아. 진짜 삶이니까. 완벽하진 않지만 진짜야. 그게 안 보인다면 눈이 먼 거니 그만둘게.”

 

이런 그의 노력에 결국 화가 났던 그녀의 마음도 스르르 녹아내립니다. 

제시의 말처럼, 뜨거웠던 낭만적 사랑도, 모든 것이 완벽히 갖추어진 완전한 사랑도 어쩌면 동화 속에서나 영원히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하는 사랑이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고 해서, 불만족스럽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진짜로서 존재하는 지금의 사랑을 들여다보며 약해진 불씨에 열심히 부채질하다 보면, 내일은 또 다른 모습의 사랑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을까요.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원장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대구가톨릭대병원 의과대학 학사 , 석사
대구가톨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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