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직장생활을 하는 환자분이 열심히 준비한 서류를 상사에게 가져갔더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고 합니다. “부족한 부분에 대해 피드백을 주시면 수정해 보겠습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칭찬도, 비판도 아닌 상사의 “나쁘지 않아”라는 말에 왠지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환자분은 차라리 상사가 속 시원하게 잘못을 짚어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분명 숨겨진 뜻이 있는 것 같은데 의중을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은 타인과의 소통 과정에서 빈번히 발생합니다. 연인 관계에 대입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격렬한 말다툼 끝에 상대가 “우리 시간을 갖자.”라고 한다면, 처음엔 더욱 분노하거나 덜컥 겁이 날 것입니다. 그러다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죠. 홧김에 한 이야기인지, 정말 떨어져 있자는 것인지, 이별까지 생각하는 건지, 상대의 진심에 대한 의문 말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하고, 또 소통합니다. 대화란, 사전적 의미로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 또는 그 이야기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각이나 의미를 주고받고, 나아가 비언어적 메시지까지 활용해 소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를 총칭해 의사소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동양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표현이나 단어가 이중적 의미를 지닐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땐 대화의 분위기나 맥락, 상대의 비언어적 메시지를 통해 의중을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 시간을 갖자.”라는 말에는 자신의 강경한 태도에 상대가 “잘못했다.”며 한발 물러나 주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것처럼요. 

영국 노팅엄 대학교의 언어심리학과 교수 Dörnyei가 규정한 의사소통에 대한 정의는 이런 특성을 잘 나타내 줍니다. 그는 의사소통이란, “화자가 의식한 언어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고자 잠재적으로 의도하는 모든 시도”라고 말했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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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의사소통의 문제는 어떤 상황에서 왜, 발생하는 걸까요? 

기본적으로 양쪽 모두 소통의 의지가 있지만,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이에 대한 청자의 이해가 다를 때 발생합니다. 이를 ‘의사소통의 불일치’라고 하며, 종류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오해’는 의사소통의 불일치가 발생한 것을 알지만, 이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불완전한 이해’는 화자의 말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거나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황을 가리킵니다.

통상 화자의 의도가 확실한데 청자가 ‘오해’한 경우, 화자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도록 단서를 던지거나 말을 반복합니다. 자신이 “시간을 갖자.”라고 했을 때 상대가 아무런 거부 없이 “알았어.”라고 한다면, “주말에 모임이 있으니까 그 이후부터 떨어져 있자.” 혹은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진짜 시간을 갖자는 거야?” 등의 말로 여지를 남기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는 청자가 화자의 의도를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불완전한 이해’의 상황입니다. 화자의 말이 의도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숨은 진심을 모르겠을 때 거대한 의사소통의 장벽이 생깁니다. 연인이 “괜찮다.”라고 말하면서 표정과 분위기로 불쾌한 감정을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때,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도통 모르겠다면 답답함과 짜증이 밀려올 뿐입니다. 말다툼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이럴 땐 다음의 두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① 바꿔서 정의하기 

자신이 이해한 범위 내에서 촉발어(trigger)를 다른 단어로 바꿔 다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는 게 목적입니다. 

연인의 “시간을 갖자.”는 말이 이별 신호로 느껴진다면, “너는 나와 헤어지고 싶구나.” 또는 “너는 우리가 서로 상관없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구나.” 등의 말로 답변해 보세요. 상대방의 언어로 자신의 말을 듣게 된 화자는 본인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부연 설명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② 쪼개서 물어보기 

화자의 의도가 드러날 수 있도록 확인을 요구하는 방법입니다. 말을 꺼낸 화자도 자신의 진심을 정확히 모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화자 스스로 자신의 말을 인식하고 의도를 드러내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갖자는 건 연락하지 말라는 뜻이지? 문자도 안 되는 거야?” 혹은 “며칠까지 연락하지 말라는 거야? 그 이후에 어디서 볼까?” 등의 질문을 던져 보세요. 화자는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상대방의 질문에 본인의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게 됩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의 목적은 화자의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진심을 파악하기 어려울 때 이해한 척하거나, 어림짐작한 상태로 상황을 모면하는 것은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기생충>으로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며 “자막, 그 1인치의 장벽을 넘으면 훨씬 더 좋은 영화를 만날 수 있다.”라는 명언을 남겼죠. 타인과의 소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등을 회피하는 대신, 내가 이해한 것을 확인하고 상대의 의도를 정교화하는 것이 의사소통의 불일치, 그 1인치의 장벽을 넘어 더욱 견고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석사,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 자문위원
보건복지부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 위원
한국산림치유포럼 이사, 숲 치유 프로그램 연구위원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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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의 글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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