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광화문 숲 정신과, 한명훈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취업준비 중인 25살 여자입니다.

타인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어서 고민입니다.

저에게 문제가 있다고 느끼지만 정확히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저는 어릴 때부터 가족과 제대로 소통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 기억 속에서 어린 저는 시도 때도 없이 부모님께 맞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저를 먹이고 병원에 데려가시는 일엔 적극적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 제게 먼저 말을 걸기는커녕 필요 없는 대화는 거의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외적으로 부모님의 기분이 좋으실 때만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대화 주제도 ‘학교생활에 필요한 건 없냐, 뭘 해야 하냐’는 주제들 뿐이었습니다.

반대로 기분이 좋지 않으면 무조건 저에게 손찌검을 하기 때문에 최대한 집 밖에 있는 시간을 늘려야 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심각할 정도로 눈치가 없고 주관도 뚜렷하지 않습니다. 비교적 최근엔 단순한 사고밖에 못하는 머리인 걸 알아챘습니다. 흐린 판단력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두려워집니다.

이렇게 우울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면 연락도 전부 피하고 혼자 있고 싶습니다. 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에 질려 떠난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연락에서만큼은 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 당황하고 끝내엔 질려하겠죠.

그러나 제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울할 땐 스스로 저를 통제하기가 어려우니 휴대폰을 부수고 싶습니다. 그렇게라도 연락을 피할 변명을 만들고 싶습니다. 저는 언제나 과하게 우울하고 과하게 충동적입니다. 주변에 우울하다고, 그래서 연락하기 힘들다고. 그렇게 말하기엔 이미 제 우울함이 그들을 충분히 지겹게 하고 있습니다. 제 주변인은 이런 모습에 쉽게 지치거나 쉽게 멀어졌습니다. 언제쯤이면 우울하지 않냐고 농담을 섞어 말해오기도 했습니다.

 

언제부터 우울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우울하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울함은 당연했고 받아들이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배려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 옆에서 누군가 힘들어한다면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겠죠. 이해합니다.

저는 우울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우울함에 잠식될 때 일상을 버티기 힘들기 때문에 주변의 이해와 적당한 무관심을 원할 뿐입니다. 저를 품어주려는 사람은 부담스럽습니다. 제 고통이 타인에게도 고통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울함을 숨길 수 있습니다. 충동도 티 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겐 상식 밖의 행동이 너무나 당연해서 오히려 그런 점이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허우대는 멀쩡한데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제 모습이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주는 모양입니다. 상식이 무엇인지 어떻게 분위기를 맞춰야 하는지 너무 힘듭니다. 타인이 저를 어떻게 바라볼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은 전부 죽어도 마땅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죽도록 부끄러워한다면 당연한 일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타인을 존중하는 모습에 속이 뒤틀립니다. 왜 뒤틀리는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막연히 나에게 만족하지 못해서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유를 알고 싶은데 알지 못하는 것들이 수두룩합니다. 정확하게 알게 된다면 고칠 수 있을 텐데…

그 밖에도 제가 하는 생각들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논리 하나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 있는 맥락에서 훨씬 벗어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면 속이 뒤틀립니다. 시덥잖은 대화보다 때리고 싸우고 질투하고…그런 것에 더 강하게 끌리지 않는지 지루한 대화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에 지칩니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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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광화문 숲 정신건강의학과 한명훈입니다.

타인과의 관계와 마음 안에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우울감과 충동으로 괴로움을 겪으시는군요.

작성자님의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경험해온 괴로움을 짧은 글로 감히 가늠할 수 없겠지만 오랜 고통과 슬픔이 느껴집니다.

 

성격과 관계 양상이라는 것은 타고나는 기질과 자라온 환경이 더불어 형성되게 됩니다. 모든 것을 환경의 영향으로 볼 수는 없겠으나 가족 내에서 있었던 상호작용이 대인 관계에 대한 어려움이 영향이 있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물론 이후에도 여러 사람들, 또래, 학교 환경들도 영향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과의 관계를 통해 성격 형성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부모님께 생존과 건강에 대해서는 보살핌을 받았으나, 엄격한 양육과 대화가 적은 상황은 감정을 비롯한 마음의 공감은 부족했었던 것 같네요. 기분에 따라 화를 내거나 심지어 맞기도 하셨다면 어린 작성자님의 마음에 상처가 깊게 남아 성인이 된 지금도 영향을 주고 있겠습니다.

감정적인 수용을 받아본 경험이 많지 않고 부모님의 기분에 따라 내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눈치를 봐야만 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마음에 대해 솔직하기보다는 자신을 숨기고 외부 환경에 초점을 맞추게 되곤 합니다. 오히려 눈치가 없게 되기도 하는데, 일관적이지 않고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서는 사회적 인지 기능의 발달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감정은 양육자나 보호자 혹은 좀 더 성숙한 대상이 대신 허용해주고 소화시켜 다시 되돌려주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감정을 조절하고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되는데요.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아이들의 날것의 감정이 소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 지속적으로 괴로운 상태로 남아있게 되기도 합니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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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어린 시절 남은 기억은 성인이 된 다음에도 우리 마음속의 내면 아이로 자리 잡게 됩니다.

내면 아이는 성인이 된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 올 때 반사적으로 반응하여 두렵고 우울하고 불안함을 느낍니다. 주변의 이해와 손길이 고맙지만 두려운 것은 뿌리 깊이 남아있는 경험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고통이 익숙한 상황에서 편안한 관계보다는 강렬한 감정적 상황이 끌리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아이들이 고통스러운 과거를 대처하는 방법 중에 부모님의 사랑과 고통을 연결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고통과 관계에 대한 두려움은 일부분 위와 같은 상황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고 짐작해봅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야기가 전혀 작성자님의 상황과는 다를 수도 있고, 이뿐만 아니라 아직 말씀을 듣지 못한 또 다른 마음의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이상하고 상식 밖의 것이 아닌, 이해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어려움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전달해드리고 싶네요.

 

질문자님의 마음에 대해 상담가와 함께 알아가고 공유하며 슬퍼하는 내면 아이를 함께 알아가고, 그 안에서 괴롭지만 조금씩 다시 재양육되는 과정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한명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건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공주국립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한별,혜강병원 진료원장
서울병무청 정신건강의학과 제 1 병역판정전담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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