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1)

시작은 도봉산이었다.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지하철을 스스로 처음 타기 시작한 것도 초등학교 3-4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시에 나는 봉사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집에서 나갈 수 있는, 수단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반 친구들과 산에 가서 꽤나 봉사활동을 했는데, 그곳이 도봉산이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비교적 가까운 곳이었고, 산에 놀러 가면 계곡을 만날 수 있었다. 계곡과 꼬마들의 만남은 환상적인 조합이었다. 우리는 짧은 봉사활동을 마치고, 긴 계곡 놀이를 하곤 했는데, 여벌 옷을 챙기지도 않은 채 온 통 물에 젖어서 그러고도 히죽거리며 웃곤 했다. 그렇게 걸으면 주위 어른들은 꽤나 우리를 귀여워하셨다. 한 여름이었던지 옷이 금세 바싹 마른 채 지하철을 탔던 기억이 떠오른다.

 

구례는 주변이 큰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H친구의 초대로 구례를 방문하게 되었다. 구례 버스 터미널까지 도착해서, 다시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시내버스를 타고 구불길을 한참 가야 했다. H는 버스를 타고 몇 번째 정거장에서 내리라고 알려줬고, 나는 어린아이 마냥 그대로 했다. H는 매번 마중 나왔고, 손수 주변 가이드를 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 필요도 없이 이곳저곳을 따라다녔다. 그중에 가장 기뻤던 순간은 차를 타고 숲 초입으로 들어설 때였다. 차는 적당한 곳에 두고, 숲 입구부터는 걸어 들어갔는데, 그 상쾌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주 목마를 때 시원한 물을 벌컥 마신 기분이었다. 목표점이랄 것 없이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었다. 걷는 길에 보이는 식물 사진을 찍기도 하고, 숲에 어우러진 사람의 얼굴을 찍어 보기도 했다. 방문할 때마다 다른 계절이었기 때문에 사람의 옷차림도, 숲의 옷차림도 다양하게 기억 남는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구례 어느 숲을 방문한 것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 H와의 인연은 흩어져 흐려졌고, 그때도 지금도 나의 기억력은 그다지 좋지 않다. H와의 현재 소원해진 인연은 차지하고, 당시 나를 구례로 불러주고, 숲에 데려다줘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다.

 

가장 많이 간 곳은 제주도 일 것이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숲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드라이브하며 지나다,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숲길 표지판을 목격하게 되었다. 당시 해가 아직 지진 않았지만, 슬슬 어둠이 찾아오는 시간이었는데 ‘조금이라도 걸어볼까’와 ‘슬슬 숙소로 들어가 볼까’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치기가 생겨서 ‘걸어보자’로 기울었는데, 숲길로 들어서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훅 하니 어둠이 끼쳤다. 일행과 나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곁에 있던 말 농장도 구경하고, 우거진 숲도 구경하며 마저 걸었다. 그 누구도 먼저 ‘돌아가자’를 말하지 않았다. 그건 자존심이었을까, 배려였을까. 아무튼 쓸데없는 감정 덕에 꽤나 깊이 숲으로 들어섰고, 돌아갈 길이 막막해질 때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차가 있는 시작점으로 줄행랑치듯이 빠르게 돌아갔다.

 

사려니 숲은 비 오는 날에 가세요.

사려니 숲은 꽤 유명한 숲길이다. 관광객도 많고, 그 때문에 주차난을 오랫동안 겪었던 곳이다. 최근에는 근처에 숲 일부를 밀어내고, 주차장을 만들어 관광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이 숲을 위한 일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제주를 찾았던 초반부터 사려니 숲을 추천받아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도(지금만큼은 아니더라도) 유명한 숲이었다. 일반 코스는 2-3시간 정도 걸린다. 물론 어느 숲에서든 마찬가지로 돌아갈 길을 계산해서 힘들겠다 싶으면 돌아가도 좋다. 제주의 날씨는 제주 할망도 모른다고, 날씨가 순식간에 변하곤 한다. 언젠가는 사려니 숲을 찾았을 때 마침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도착하자, 우비를 입고 우산을 썼지만 강한 비가 내렸고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챙겨 온 나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사진을 포기하고 터덜터덜 걷는데, 빗 망울을 머금고 안개 낀 숲의 길이 너무도 감동적이었다. 그 감동은 도저히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이렇다 할 명 문장가가 아닌 나에게는 글의 표현으로도 허락되지 않는 장관이었다. 그럼에도 놓치기 싫어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엉망이겠지 하며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비가 와서 관광객이 거의 없었고, 그래서 빈 길목을 찍기에 좋았다. 나만의 길 같았고 진정 그러했다. 이 기억으로 사려니 숲은 흐린 날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물론 밝고 맑은 날의 사려니 숲도 매력이 넘칠 것이다. 안개가 껴도 역시나 좋다. 운전만 조심해서 도착한다면 그때부터는 숲이 다 한다. 깊은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충분히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숲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감정은 끝없이 다양하다. 숲은 때로 공포스럽고, 을씨년스럽고, 속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장소일 수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숲을 깊게 들여다보자, 숲은 다정하고, 포근하며 따뜻하다. 특히 한국의 숲은 인공적으로 손대지 않은 곳이 대다수이고, 나는 그런 비정형의 숲이 정말 마음에 든다.

당신에게도 어딘가에, 숨통을 트일 수 있는 당신만의 숲이 생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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