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광화문 숲 정신과, 김재옥 전문의] 

 

사연) 

저는 20대 초반 여대생입니다.

제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네요.

행복한 감정이 들다가도 내가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행복한 감정을 온전히 느끼는 것을 거부하곤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모르는 사람에게 스토킹을 당한 후로부터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그런 일을 겪게 된 것이 '나'여서 일어난 일이고 내가 조심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내 탓을 하게 되며 자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 유서를 쓰고 하루에 깨어있는 시간 내내 죽음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가족이나 친구들을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과의 마찰은 없었습니다. 제 이런 어두운 모습을 감당해야 하는 건 저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거나 힘들다고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어영부영 대학생이 되었고 처음 사귀었던 남자 친구에게 심한 집착, 의심, 폭력을 받았습니다. 첫 연애에 순수했던 마음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까지 막 다뤄지는 내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행복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고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던 탓에 제 모든 모습을 보여줬었고 믿었기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내가 참아야지 말 잘 들어야지 이해해야지 하면서 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혼자 견디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자해를 해서 몸에 상처를 냈고 피를 보면 지쳐 잠들고는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조금이라도 힘든 일이 생기면 하.. 그냥 죽어버릴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눈앞에 날카로운 물건을 보면 주머니에 넣고 집에 가서 자해할 생각을 하게 되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높은 옥상을 보면 떨어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는 제가 무섭기도 합니다. 차라리 미친 듯이 내 마음이 괴로우면 모르겠는데 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마음이 덤덤하다는 것이 답답하면서도 슬프네요.

최근부터 제 우울감이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에도 영향을 미치는 기분이 듭니다. 의학적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태겠죠?

웃다가도 끝없이 우울해지는 제 마음이 싫고 사회생활을 할 때 보이는 모습과 제 실제 모습에 괴리감이 들고 힘듭니다. 자해행동을 쉽게 하는 제 모습도 짠하고.. 가족들에게 그리고 저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도 참 미안하기도 합니다. 병원을 찾아가 보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방법으로라도 의사 선생님과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글 적어봤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사진_픽사베이

 

답변)

안녕하세요, 광화문 숲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재옥입니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달콤합니다. 하지만 초콜릿도 쓴맛이 있듯이 사랑도 쓴맛이 있습니다. 그 쓴맛이 바로 사랑이 가진 폭력적 속성이죠.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구속합니다. 자신만을 사랑할 것, 자신을 최우선 순위에 놓을 것 등, 이런 것들은 구속이며 경우에 따라 폭력적 속성을 가지기도 하죠.

이렇게 사랑과 폭력이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혼란이 생기게 됩니다. 현재 질문자분의 상황 역시 이런 사랑의 속성 때문에 나타난 듯합니다.

가스라이팅이 사랑에서 시작한 폭력이라면, 스토킹은 폭력에서 시작한 사랑입니다. 이런 이유로 스토킹은 엄연한 폭력임에도 주변 사람들은 폭력이 아닌 사랑의 일부로 해석하곤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서로의 동의하에 시작하는 것이기에 책임이 스토킹 피해자에게도 있다는 반응을 보이죠. 이런 비논리적인 주장을 오랜 시간 다양한 사람들에게 듣다 보면, 피해자 스스로도 착각을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스토킹의 일부분에는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말이죠.

 

사실 죄책감은 거의 모든 범죄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조금 더 조심했었더라면...'이라는 생각이 더 과해지면 생기는 것이 결국 '내 탓인데...'이니까요. 하지만 스토킹에서의 죄책감과 다른 범죄 피해자들이 갖는 죄책감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 지갑이 도둑맞은 사건은 내 보통 삶 속에 무언가와 헷갈릴 만한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과 폭력의 접점 때문에, 스토킹은 내 사랑 속에 스며들어 사랑을 왜곡시킵니다.

질문자분이 처음 사귀었던 남자 친구에게 심한 집착, 의심, 폭력을 당한 것이 이런 왜곡된 사랑의 영향이기도 합니다. 스토킹에 의한 죄책감이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을 낮췄으며, 낮아진 자존감은 부적절한 애인에게서 도망가는 것을 막아버립니다. 처음 사귈 때 남자 친구가 폭력적인 것을 모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폭력성이 보였을 때 그 사람을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나란 사람은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나를 때려도 사랑해 주니깐...'인 경우가 많습니다. 폭력과 사랑의 접점이 더 커진 사랑이죠.

연인이 폭력은 그 자체만으로 자존감을 낮춥니다. 여기에 더해 다른 사람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을 겪는다는 사실이 자존감을 더 낮춥니다. 자존감이 낮아졌기에 부적절한 대상에게서 도망칠 수 없고, 악순환이 시작되죠. 이런 악순환을 더 심하게 만드는 것이 자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 더해지기 때문이죠.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정당한 사랑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가치를 모르는 물건을 당근마켓에 올려놓는다면,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은 더 저렴하게 사려고 노력할 것이고,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접근하지 않거나 의미 없는 가격에 구입하려고 노력할 테니까요. 우연히 양심적인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이 크지는 않겠죠.

결국 자신이 정당한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아셔야 하며, 그 앎을 기반으로 스스로를 사랑하셔야 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공부는 질문자분의 인생의 장르를 완전히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떤 장르의 인생을 원하시는지 결정하시고, 선택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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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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