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자신의 몸을 스스로 다치게 하는 것. 이를 우리는 ‘자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미국 10대들 사이에서 ‘디지털 자해(Digital self-harm)’라는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고 합니다. ‘셀프 사이버불링(Self-cyberbullying)’이라고도 불리는 이 현상은 가짜 SNS 계정을 만들어 자신의 본래 계정에 악성 댓글을 달거나 자신에 대한 모욕적인 글을 게시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체가 아닌 ‘정신적으로’ 자신을 해하는 것이지요.

플로리다국제대학 범죄학 부교수인 라이언 멜드럼(Ryan Meldrum) 박사와 그의 동료들은 2019년에 실시된 청소년 약물 남용 조사를 바탕으로 플로리다에 거주하는 10대 만 명의 데이터를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그중 10%가 지난 일 년간 디지털 자해를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는 어쩌면 관심을 갈구하는 심리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글이 게시됐을 때 친구들이 이를 반박하거나 자신을 위로해 주는지 확인받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죠.

연구진은 그러나 더욱 심각한 이유가 존재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청소년들이 정신적 고통에 대응하는 한 방법으로, 특히 학교폭력 피해자와 디지털 자해의 상관관계가 매우 높게 나타났다고 주장했습니다. 온라인에 친숙한 요즘의 청소년들이 신체적 자해로 심적 고통을 완화하는 대신, 이를 인터넷 공간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디지털 자해에 대한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연구진은 이러한 행위가 불안이나 우울증 등의 정신건강 문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며 우려했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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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들이 자신을 해하는 현상은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에서도 새로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신체적 자해로 나타났는데, SNS 문화와 결합해 마치 하나의 트렌드처럼 유행했습니다. 트위터의 ‘우울계(우울한 계정)’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우울계 이용자들은 자신의 우울한 감정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극단적으로는 자해 사진까지 공유합니다. “위로받고 싶어서” “스트레스가 풀려서” 등의 이유를 덧붙이고는 하지요.

이를 자살의 의도가 없는 ‘비자살성 자해’라고 지칭합니다. 비자살성 자해는 정신적 고통을 회피하려는 수단일 수도, 타인에 대한 분노의 표현일 수도, 심리적 고통을 신체적 고통으로 치환함으로써 일종의 진통제처럼 사용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행위가 감당하기 힘들만큼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 터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후 순간적인 해방감을 느낄 수 있으나, 수치심이나 자기 비난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또다시 찾아오지요. 이를 떨쳐내기 위해 더욱 강한 자극을 찾게 되고 결국 자해가 습관처럼 굳어지게 됩니다.

셀프 사이버불링의 ‘자학’이든, 우울계의 ‘자해’이든, 일부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이 위기에 처해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청소년 시기의 고민은 학업, 친구 및 이성 문제, 불안한 가정 환경 등 매우 다양합니다. 어른들이 그들의 고민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단박에 알아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대신 신호, 그들의 ‘SOS(구조요청) 시그널’만큼은 기민하게 눈치챌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그들의 행위는 어쩌면 도와달라는 간절한 외침일 수 있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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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드럼 박사의 연구 결과 가운데 또 하나의 중요한 발견은 부모와 따뜻하고 소통적인 관계에 있는 청소년일수록 디지털 자해의 가능성이 낮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변의 지지와 관심이 10대들에게는 큰 위로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의 적절한 도움이 뒷받침될 때 아이들은 자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혹시 자녀의 몸에 알 수 없는 흉터가 생기지 않았는지, 유독 긴소매 옷을 즐겨 입지는 않은지 자주 살펴봐 주세요. 평소 관심이 있던 것에 대한 흥미 상실, 성적 하락, 불안, 충동성 등의 모습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자녀의 자해가 확실해졌다면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으니 지양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감정을 드러내거나,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대신 가능한 한 지지적인 자세로 자녀의 고민을 들어주는 게 좋습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전문가의 도움입니다. 다만 또래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10대 청소년들은 치료받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녀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이끌어 주며 상담이나 약물치료 등을 시도해 보는 것을 권유해 드립니다.

그 어떤 훌륭한 해결책도 문제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면 활용할 수 없습니다. 차마 말로는 털어놓지 못한 아이들의 구조 요청을 놓치지 않으려면 어떤 신호들이 있는지, 올바른 대처법은 무엇인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의 여린 마음은 순간의 잘못된 대처로도 다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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