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동래병원 이상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고등학생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자해를 시작했어요. 그 뒤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나 우울해지면 중독처럼 매번 자해했어요. 중학교 때 학교폭력을 당한 뒤 더 심해졌고 고등학교 들어와서부턴 범위가 점점 넓어지더니 숨기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하게 됐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우울증인 것 같다고 병원에 가서 약물치료를 하는 건 어떠냐고 권유하지만, 집중력 저하나 잠이 오는 것 등의 부작용이 무서워서 시도하기가 쉽지 않아요. 전 아직 학생이고 공부를 해야 하는데 혹여나 공부에 방해가 될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제 나름 극복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럴 때마다 어쭙잖은 어른들의 위로나 관심을 받고 싶은 거냐는 편견들에 결과적으로 더 큰 상처만 받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빠에게 받았던 폭력들과 중학교 시절 학교폭력의 기억들 또한 저를 더욱더 우울하게 만듭니다. 연애도 인간관계도 다 사랑받으려고 애쓰는 제 모습이 더럽게 느껴지고 짜증이 나요.

근데 요즘 들어 정말 일상 중에서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 무기력해지고 힘이 빠져 일상생활도 제대로 소화하기 힘들어요. 이러다 공부에도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무섭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제 우울감이 전파되진 않을까 미안하고 걱정되기도 합니다. 대체 제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도움 청하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글 남겨요. 제발 도와주세요.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동래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상준입니다.

먼저 답변에 오랜 시간이 걸린 점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어렵게 질문을 하신 이후로도 많이 힘드셨지요.

길지 않은 글이지만 질문자님의 어린 시절부터 이때까지의 삶에 얼마나 많은 상처들이 있었을지를 생각해봅니다. 글자 하나하나에 그 아픔이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길지 않다는 점에서 지치고 무뎌진 마음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네요. 더구나 질문자님이 아직 고등학생이라는 점에 더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아파하던 모습들이 병 때문이 아닌 마치 나 자신은 원래 이런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이 게시판이 도움을 청하는 창구가 될 수 있는 것이 다행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아직까지 병원으로 직접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해주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질문하신 내용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와 면담이 필요합니다만 우선 질문하신 내용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 위주로 답변을 드려봅니다.

 

언급하신 증상들을 먼저 짚어볼까요.

반복적이고 점차 정도가 심해지는 자해.
점점 심해지는 자살에 대한 생각.
만성적인 우울감. 무기력감. 대인관계에서의 걱정과 어려움.
일상과 학업에의 부정적 영향
이들과 관련 있는 심리적 외상들 – 아버지의 폭력과 학교폭력 등

이러한 모습들은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다루는 분명한 증상들입니다. 머리가 아프고 기침이 나오고 멍이 들고 피가 나는 것처럼 치료를 요하는 증상들이지요.

 

고등학생이라고 한다면 이 사회에서 아직은 독립적으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이 벅찰 수 있는 나이입니다. 전문의로서 그리고 먼저 산 어른으로서도 보다 명확히 말씀드립니다. 질문자님은 아픈 게 맞습니다. 그리고 치료가 필요합니다. 혼자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할지 모르는 게 한편으론 당연합니다. 이미 그 아픔이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는 넘어섰기 때문이에요.

가장 우려되는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되어왔다는 자해와 죽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자해를 반복해서 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지지는 않았나요?
누구나 힘들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죽는 것도 자해처럼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사람들은 슬픔, 분노, 좌절, 불안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압도될 때 누구나 충동적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자해도 그런 맥락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벽을 주먹으로 내려치거나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고, 다칠 수 있음에도 주변 물건을 마구 던지거나 아예 몸을 어딘가로 내던져버리는 등의 극단적인 모습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중요한 일과나 지위를 포기해 버리거나 단식을 하는 것 등도 넓은 의미의 자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한 스트레스 하에 충동적인 모습은 어찌 보면 상황에 따른 그럴듯한 반응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살면서 한두 차례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요.

하지만 반복되는 자해는 이와 다릅니다. 언젠가부터 자해를 특정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준비된 선택지처럼 이용하는 것이지요. 자해를 선택함에 있어서 충동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그 방법이나 형태는 이미 내가 사전에 인지하고 준비해 놓은 것이 됩니다. 해결되지 않은 고통에 내몰리다 끝내 버티기 위해 선택한 자해가 이제는 나를 위로해주는 유일한 방법처럼 되어버립니다. 이런 반복적인 자해를 한다는 건 결코 누구나 쉽게, 흔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자해가 가지는 교과서적인 의미들이 있지만, 실제 진료하며 만났던 분들의 느낌들을 옮겨와 보겠습니다. 반복적으로 자해를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분명 자해가 좋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자해를 하게 된다고 해요.

자해를 하는 순간에는 힘들었던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고 나아가 해방감이 든다고 표현합니다. 자해할 때의 신체 감각에 집중하거나 자해 직후 나타나는 피나 상처들을 보면서 자신에 대한 어떠한 통제감이나 안도를 느끼고, 스스로를 벌한다는 생각에 죄책감에서도 벗어나는 것 같다고도 합니다. 마치 그 순간에 꼭 해야 할 과제인 것처럼 자해를 하고 나서야 뭔가 마무리된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죠. 질문자님은 어떠신가요?

 

질문자님의 경우에도 처음 몇 번의 자해는 너무 힘든 상황에서 그만 충동적으로 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아주 어린아이들의 경우를 볼까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알지 못하고, 표현도 서툴기 때문에 자해를 하기도 합니다. 또 엄마와 아빠에게 나를 봐달라고 자해를 하기도 하지요. 그저 초등학생일 뿐이었던 질문자님도 비슷한 상황이 있지 않았을까요. 너무나도 벗어나고 싶은 힘든 상황이 있었거나, 홀로 감당하기 벅찬 감정의 소용돌이가 있었거나,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특히나 부모님과의 관계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의 극단적인 예를 들어볼게요. 만약 한 아이의 부모가 당신의 부정적 감정 해소를 위해 잦은 폭력을 사용했고, 그 대상이 자신의 위력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아이였다면 그 아이는 자신의 어려움에 어떻게 대처하게 될까요. 더구나 그 아이의 아픔을 이해해주는 다른 어른이 없거나 그런 관계 경험이 부족하여 오로지 혼자 어려움에 대처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아직 어린아이는 자신이 보고 배운 방법만을 사용할지도 모릅니다. 부모처럼 자신의 위력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지요. 가장 가까이는 바로 나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이 있다고 하셨지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네요. 자해를 반복하는 분들을 보면 어린 시절 부모와의 애착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답니다. 애착 문제는 향후 자신에 대한 자기감과 심리적 안정, 대인관계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주기에 이런 분들은 자기감의 부재, 정체성의 혼란, 대인관계의 어려움, 특히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리적 어려움을 해소해주는 데다가 익숙해지면 별로 어렵게 느껴지지도 않는 자해가 딱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해가 주는 강렬한 자극과 긴장해소는 그 순간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여전히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들은 남아있습니다. 새로이 남은 상처와 흉터들은 나에게 또 다른 괴로움을 안겨줄 뿐입니다. 

질문자님은 중독처럼 자해를 하게 된다고 하셨지요. 맞습니다. 자해라는 중독에 빠지면 이제는 정도와 상관없이 심리적 고통에는 무조건적으로 자해를 하면서, 보다 건강하고 적응적인 대처 방법을 찾는 기회를 없애 버릴 것입니다. 내성이 생기면서 자해는 점점 강한 자극의 형태를 띠게 될 것이고 그만큼 남는 상처도 더 커지게 될 것입니다. 말했듯 정작 날 괴롭게 한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을 뿐이고요.

더구나 자해행동은 정신건강의학과에서 가장 우려하는 증상인 자살의 위험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자해행동 자체가 내가 부정적인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설사 나는 자살에 대한 생각이 없다고 할지라도 반복되는 자해가 있을 경우엔 항상 자살의 위험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 “숨기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 “일상 중에서도 죽고 싶은 생각이 너무 많이 들고 무기력해지고 힘이 빠져 일상생활도 제대로 소화하기 힘들어요”

그러니 이러한 질문자님의 마음 표현에 답글을 쓰는 제 마음도 매우 무겁고 걱정스럽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질문자님은 일단 치료 환경 내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반복되는 자해와 자살사고, 우울증에 대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우울증에 대한 약물치료와 더불어 정기적으로 내 마음이 어떤지, 내가 어떤 행동들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자해와 자살사고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야기해야 합니다.

앞서 자해의 목적과 원인 등에 대해 언급하긴 했지만, 치료에서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자해의 빈도를 줄여나가면서 심리적인 어려움을 해결할 것인가?’입니다. 자살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왜 자해를 하게 되었고 나에게 자해가 어떤 의미인지 깊이 탐색하는 것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선 중요한 작업이긴 하나 당장 급한 것은 아닙니다.

 

약물치료의 부작용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약의 종류와 환자분에 따라 나타날 수 있는 반응은 다르지만, 집중력 저하나 졸린 부작용 등을 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더구나 현재 질문자님에게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약은 그러한 부작용이 거의 없는 약들이 대부분입니다. 적절한 치료는 오히려 우울증으로 인한 집중력 저하나 무기력감 등을 개선해 줄 거예요.

학업에 대한 걱정도 비슷한 맥락이겠지요. 이 힘든 와중에도 학업에 대한 걱정을 하는 걸 보면 한편으론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그것이 공부라서가 아니라 힘든 상황에서 나에게 주어진 과업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은 질문자님의 큰 장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학업 걱정으로 치료를 미루거나 주저하는 것은 우선순위가 맞지 않아요. 호소하시는 증상대로라면 이미 일상과 학업 생활에서 중대한 기능 저하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치료를 하는 것이 어떠한 성취를 이루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질문자님은 아직 미성년자이고 청소년기는 정신건강의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시기이기에 전문가의 개입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늦을수록 나의 아픈 모습들이 더욱 고착화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더구나 나와 또래 모두가 비슷한 처지와 환경에 있는 것과는 달리, 성인이 되면 다양한 환경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여러 가지 지위와 책임이 부여된답니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많은 일들도 더 일어나지요. 그때는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 더욱 복잡해지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아직 미성년자이기에 병원에 가는 것에 대한 보호자 동의를 빼놓을 수 없겠네요. 혹여 이것이 또 치료를 받기에 어려운 부분은 아닐지 걱정이 됩니다. 부모님이든 조부모님이든 친척이든 질문자님의 어려움에 대해 알리고 병원에 방문하시길 바랍니다. 학교에 상담과 관련한 절차가 있다면 그것을 이용해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병원을 가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회성 글로는 많은 걸 전달하기가 어렵네요.

모쪼록 적절한 치료와 도움으로, 나를 이해하며 나를 사랑할 수 있고 그렇기에 더 이상 스스로에게 상처 주는 일이 필요 없는 그날이 오길 바랍니다. 웃으면서 매일 아침 눈 뜰 수 있으면서요.

답변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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