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조성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 픽사베이

 

돌 즈음 벌어지는 위대한 사건. 네발로 기던 아기가 스스로 직립을 달성한다. 이제 아기는 그 위태로워 보이는 직립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세상이 자기 발 아래 놓이는 획기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 영웅적인 광경을 지켜보는 가족 모두는 놀라 소리치며 환호한다.

 

그렇지만 엄마에게 모든 걸 절대적으로 의존하기만 했던 아기가 점차 능동적으로 스스로의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이제 아기는 수동적으로 가만히 누워 젖을 빨고 자장가를 듣는 것이 못마땅해진다. 온 몸으로 중력에 저항하기라도 하듯 아기는 눕혀놓으면 튀어올라 몇 번씩 몸을 일으킨다. 혼자 수월하게 하던 기저귀 갈기도 더욱 버거워진다. 안정적인 직립 이후 당당하게 걸음마까지 가능해지면 그 때부터는 세상과 마치 황홀한 연애라도 하듯 피곤해 지치기 전까지 온 세계를 춤추며 탐험하기 시작한다. 바닥에 떨어진 딸기를 주워먹고 더러운 쓰레기통을 만지며 위태롭게 소파 위를 기어 올라가려 애쓴다.

 

미국의 발달심리학자인 에릭 에릭슨(Erik H. Erikson. 1902-1994)의 심리사회적 발달이론(Psychosocial developmental theory)에 따르면, 출생 후 1살까지 영유아가 양육자와의 건강한 ‘신뢰감’을 발달시키고 나면 이후에는 능동적인 언어와 신체 발달이 이뤄지면서 ‘자율성’이라는 발달과제를 맞이하게 된다고 하였는데, 아기는 부모로부터 독립선언을 하기에 다다른 것이다.

 

그러자 부모는 낙원의 세상에서 제멋대로 즐기고 있는 아기라는 미개인의 문명화에 나선다. 예의범절과 교양을 갖춘 좀더 높은 계층의 문화세계로 이끌기 위해서다. 하지만 걸음마 무렵의 아기는 더 이상 협조적인 파트너가 아니다.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단어라고 해봤자 몇 개 되지도 않은데 유독 ‘아니’, ‘싫어’라는 말을 자주 내뱉는다. ‘엄마의 요구에 반대로 행동하라’가 독립선언문의 전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엄마는 아기의 거부권 행사를 무조건 인정할 순 없다. 엄마로선 엄마 젖병 대신 컵을 선택하도록 해야하고, 변기를 사용해서 대소변을 가리도록 교육 시켜야하며, 위생과 안전을 위해 아무거나 입안으로 가져가는걸 제한해야 한다. 결국 고되고 반복되는 전쟁이 여기저기에서 시작된다.

 

사진 픽사베이

 

  • 그 여러 국지전 중 하루에도 몇 번씩 벌어지는 것이 밥상 전쟁이다.

 

13개월 우진이(가명)와 엄마는 오늘도 밥상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먹이려는 엄마와 먹지 않으려는 아이. 최근 들어 우진이의 단식투쟁은 더욱 완고하고 격렬해졌다. 엄마가 내미는 숟가락을 우진이는 밀어내기 일쑤이고 심지어 컵을 쳐서 바닥에 우유를 쏟아버린다. 촉촉한 맨밥에만 겨우 입을 벌리고 그 외 반찬에는 고개를 돌려버린다. 한입 먹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들썩거린다. 엄마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우진이는 손으로 음식을 집어 들어 사방에 던지기도 한다. 먹는 양이 얼마 안되다 보니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는 엄마의 읍소에도 아랑곳 않고 우진이는 오히려 더 칭얼대고 징징거리며 식사를 거부한다. 뭔지 모르겠으나 아기가 강력한 반감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출생 후 얼마 전까지 이유식도 잘 먹고 뭘 만들어줘도 양껏 먹던 아기였다. 하지만 돌이 다가올 무렵부터 음식을 뱉고 던지고 하더니 이제는 아예 먹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인터넷이나 책을 찾아봐도 먹는 것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재밌게 해주라고 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엄마의 눈물겨운 수고와 속타는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야속하기만 하고 어떨 땐 밉살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니 짜증이 늘어나는 건 당연했다. 배고플 때까지 굶기면 나중에 주는대로 먹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어디 그렇게 되는가. 영양이 부족할까, 성장이나 발육이 지체될까, 밥상머리 예절도 갖추지 못한채 편의대로 밥을 먹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 결국 엄마는 한 숟가락만 더 먹자며 우진이에게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지친 엄마는 지저분해진 식탁과 바닥을 닦으면서 우진이가 식사를 거부하는 것이 음식 맛이 없어서가 아닐까 싶어 자신의 음식솜씨를 책망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무거나 주는대로 잘 먹는다는 다른 집 아기들이 마냥 부러웠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무엇이 엄마를 이토록 좌절하고 무력하게 만든걸까. 엄마는 그 이유를 며칠이 지난 우연한 기회를 통해 알게 된다.

 

그날은 바쁜 회사일로 늘 늦은 귀가를 하던 우진이 아빠가 오랜만에 일찍 집에 들어와 엄마가 저녁을 하는 동안 우진이 식사 당번을 대신 맡게 되었다. 그런데 우진이가 배불리 잘 먹고 있는게 아닌가. 그동안 우진이가 식사를 거부했던 이유가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실패했다는 생각과 함께 자책감이 밀려왔다. 그러면서 아빠와의 식사 장면을 지켜봤다.

 

우진이는 아빠한테서 숟가락을 빼앗아 볶은 야채를 듬뿍 떠서 입으로 가져가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얼굴에 처덕처덕 범벅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아빠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식탁 위 컵을 두손으로 덥석 잡더니 얼굴 쪽으로 가져가려다 쏟고 만다. 우유가 식탁과 바닥에 폭포처럼 쏟아졌지만 아빠는 여전히 침착하다. 30여분의 식사가 마칠 무렵 우진이의 얼굴은 초록과 오렌지색 범벅이 되어 있었다. 옷과 바닥은 여기저기 얼룩이 졌고 양손은 소스로 끈적끈적해져 있었다. 그래도 나름 즐거운 식사를 마친 듯한 표정이었다. 우진이에게 아빠는 미개하지만 재밌는 혼자만의 놀이를 방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자녀의 균형잡힌 영양섭취를 위한 엄마의 노력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럴 리 없다. 우진이의 엄마는 누구보다 육아에 정성을 다하고 골똘히 힘써왔다. 육아서적과 인터넷을 통해 아이의 기초영양정보에 관해 공부했고 뇌와 신체 발달에 유익하다는 재료들로 매일 새로운 반찬과 간식을 만드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간식량과 식사시간을 체크하여 규칙적이고 일정하게 식단을 조절했다. 아이를 옆에 앉히고 달래고 어르면서 손수 밥을 떠먹이느라 정작 본인은 한참 후에나 식은 밥으로 지치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일쑤였다. 음식을 흘리면 닦고 숟가락을 뺏어 던지면 다른 숟가락을 가지고 와서 떠먹였다. 그럼에도 더욱 억세지는 아이의 고집...

 

결국 우진이의 고집을 꺾지 못한 엄마는 ‘최선을 다해 아이에게 좋은 것만 먹여야한다’는 책임감을 조금 내려놓는 것이 아이와 엄마를 위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좌절을 겪으면서 느끼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제 엄마는 믿기로 했다. 우진이가 음식을 거부했던 이유가 엄마의 노력과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으며 엄마의 음식솜씨 탓은 더더욱 아니었음을.(수많은 블로그들은 엄마들로 하여금 온갖 신선한 재료들을 갈아서 색색의 그릇들로 아이의 밥상을 채워줘야 할 것 같은 부담을 갖게 만든다. 넘쳐나는 푸드블로거들의 글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엄마에게 ‘부족한 엄마’라는 죄책감을 갖게 만든다.) 음식을 하고 아이에게 먹이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과 수고를 들이며 전쟁을 벌인 후 엄마의 마음에 남는 피로감과 짜증스러움은 결국에는 다음 식사시간을 더욱 격렬한 전쟁으로 만들 뿐이라는 것을.

 

실은 우진이 또래의 아이들은 음식을 던져 주변이 지저분해 지는 걸 즐거워한다. 지금까지 엄마와 일체감을 느끼며 외부 대상에 대한 인식이 흐릿했던 아기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넘쳐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질의 움직임과 변화가 신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컵에서 우유가 쏟아지는 광경도 놀라울 따름이다. 또 쏟아보고 싶다. 게다가 이 또래의 아기들은 변덕이 심해 어떤 날은 삶은 달걀만 먹으려고 했다가도 어떤 날은 입에도 대지 않으려 하거나 빵을 반으로 잘라 주면 먹지만 3-4등분하면 안먹으려 한다. 돌이 지나면 성장속도가 다소 둔화되는데다 영양 필요량은 아기마다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표준체중 범위 안에 속한다면 유아기 특유의 일시적인 식욕부진은 성장발달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다. 그러니 먹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억지로 먹인 ‘한 숟가락’의 영양은 별 의미가 없음은 자명하다.

 

이제 엄마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우진이가 원하는 자율식사의 많은 부분을 허용하기로 했다. 우선 우진이가 원하는 숟가락과 포크를 사용하게 했다. 또 컵 안의 주스와 우유를 마음대로 마시도록 했다(대신 바닥에 겨우 깔릴 정도로만 담아주었다). 으깬 감자나 삶은 계란 등 아이가 손으로 집어 먹기 편한 음식을 만들어 숟가락 대신 손으로 만져도 여유롭게 지켜봐주었다. 아기가 바닥에 음식을 흘리고 얼굴이 범벅이 되어도 이것이 양육의 위기가 아님을, 양육자로서 무능의 증거가 아님을 엄마는 안다. 우진이 역시도 밥상 위에서 쟁취하고자 하는 자신의 권리가 빼앗기지 않는다고 안심이 되면서 식사 시간을 즐거워할 것이다.

 

사진 픽사베이

 

하지만 이대로 두어도 진짜 괜찮을까. 이렇게만 둔다면 더 자라서도 밥상 예절을 갖추지 못한 채 밥상을 난장판으로 만들지 않을까. 제 멋대로 먹고 싶은 것만 편식하게 되지는 않을까.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어 무리한 통제권을 발동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처음이기에 생길 수밖에 없는 두려움과 불안 때문이다. 쉽지 않겠지만 그 두려움과 염려는 일단 접어두자. 왜냐면 아기는 서툴지만 우리의 예상보다 잘 해내기 때문이다. 소근육 발달과 함께 정교한 운동이 가능해지면 아기는 더 이상 흘리지 않고 컵으로 우유를 마시게 될 것이며 숟가락질을 하면서 음식을 얼굴에 묻히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음식을 만지는 원시적이고 감각적인 재미를 넘어 자연스럽게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고 타인과 상호작용 하는 일에 더욱 관심과 흥미를 보이게 될 것이다. 혼자 스스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유능감을 느끼게 되고 혼자서 밥그릇을 비워내는 순간 듣게 될 엄마로부터 칭찬과 응원에 더욱 행복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점차 아기는 자신을 개화시키려는 엄마의 의도가 결코 자신의 독립권을 빼앗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상대하는 아기는 이제 막 세상이 자기 발 아래 놓이는 전능함을 경험하면서 자신을 둘러싼 세상 모든 것들을 탐구하는 즐거움을 맛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잘 시간을 알리면서 재우려는 시도는 즐거운 세상을 뺏고 어둠의 세계로 돌려보내려는 것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기를 써가며 눈을 부릅뜨는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 매일 벌어지는 밥상 전쟁.

 

엄마가 악전고투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매일 벌이는 이유는 오로지 아이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삼시세끼 잘 먹여 꼬물락거릴 줄이나 알고 말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이 미숙한 존재를 건강하게 키워내고 싶은 소박한 바램, 바로 그것뿐이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엄마가 주는대로 받아먹는 아이를 보며 흐뭇해할 수 있을까. 그보다는 의존적이고 수동적이기만 했던 무력한 존재가 드디어 세상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알기 시작했음 확인하는 순간이 더 감격스럽지 않을까. 이 심오하고 오묘한 세계 속에서 다양한 실험과 새로운 발견을 해낼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또하나의 인격이 탄생한 순간을 말이다.

 

 

조성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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