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픽사베이

 

태동으로 느껴지는 존재에 마냥 신기해하며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누었던 몇 달의 시간. 마침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작고 연약한 생명체를 행여 부서지기라도 할세라 두 손으로 조심스레 잡았던 첫 순간을 잊지 못하실테죠. 선잠에서 깨어나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엄마 아빠를 향해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짓던 순진하고 수수께끼 같은 표정도 생생하실 겁니다. 그 작고 경이로운 얼굴은 마치 태고의 신비를 담고 있는 것 같았죠. 아기를 둘러싼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일가친척들은 꼬물거리는 아기의 작은 반응에도 일제히 감탄하며 즐거워했었지요.

 

하지만 아기와 조우한 기쁨도 잠시, 이내 세상의 많은 엄마와 아빠들은 난생처음 겪을 수밖에 없는 난관들에 봉착하게 됩니다. 당장 말을 할 수 없는 아기가 보채거나 악을 쓰며 울어댈 때 대체 그 반응이 어떤 연유 때문이지 알 길이 없어 답답해하기만 합니다. 아이의 울음소리만으로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면 육아의 절반을 해내는 것이라고 하는데, 육아가 처음인 부모들에겐 다 똑같은 울음소리처럼 들립니다. 사실 출생 초기에 생존이 존재의 이유일 수밖에 없는 아기들은 예상치 못한 모든 일에 대해 그것이 모두 위험인 것처럼 반응합니다. 갑자기 큰 소리나 강한 빛도 아기에게는 충격이 되기도 하죠. 이런 수많은 상황에 울음으로 반응하는 아기에게 부모는 젖을 물려주기도, 기저귀를 갈아주기도, 안고 자장가를 불러주며 토닥거려 주기도 합니다. 온갖 방법에도 소용이 없다 싶으면 앞서 아기를 낳은 형제나 친구, 아기의 할머니에게 도움을 구하기도 하고 다급한 마음에 병원 응급실로 아기를 안고 달려가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시도와 시행착오 끝에 부모는 아이가 보내는 신호의 의미를 조금씩 이해해 나갑니다. 그리고 종내에는 아기의 칭얼거림과 울음은 그치게 되죠. 동화 속 마법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기는 소록소록 잠이 듭니다.

 

그런데 아기가 보내는 신호를 부모가 알아차리고 그 욕구를 만족시켜줄 때까지 부모가 겪게 되는 당혹스러움과 답답함 못지않게 아기가 느끼는 심리적 공포와 긴장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아니, 아마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고통일 것입니다. 출생 후 몇 주 동안 아기는 원시적 혼란 속에서 희미하게 외부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에 아기를 지배하는 것은 욕구와 만족입니다. 이 시기에는 아기에게 배고픔은 굶어 죽기 직전의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긴박한 고통일 뿐입니다. 배고픔을 해소하는 건 생존을 위협받는 아기에겐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하는 과제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아이의 울음은 너무나도 절박하고 필사적인 외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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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세상 어떤 부모가 아기의 애절한 요구를 그 즉시 완벽하게 만족시켜줄 수 있을까요. 아기의 울음이 배고픔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젖병을 찾고, 우유를 데우고, 온도를 맞추기 위한 시간동안 아기의 욕구 만족은 지연될 수밖에 없거든요. 아주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죽음의 공포에 비견될 정도의 배고픔의 고통은 아기에겐 가혹한 좌절의 경험입니다. 어디 배고픔 뿐인가요. 배앓이 같은 신체적 불편함, 추위와 더위, 느닷없는 큰소리, 익숙한 얼굴의 사라짐, 악몽 후의 두려움 등 아기를 좌절시키는 자극과 상황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럴때는 그야말로 우는 것 말고는 속수무책입니다. 하지만 이 순간 놀랍게도 부모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방법을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내 곧 아기는 따뜻한 엄마의 가슴이나 젖병을 만나게 되고 만족스러운 포만감과 함께 엄마의 다정한 돌봄과 보호받는 느낌을 통해 평온을 되찾고 아기의 좌절은 중단됩니다. 그리고 애착이 형성되어감에 따라 아기의 욕구에 부모가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면서 좌절을 견뎌야 하는 시간은 점점 짧아집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수백번 수천번 반복되면 자라나는 아이의 뇌에서는 학습이 이루어집니다. 비록 지금 이 고통이 죽을만큼 괴롭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외부존재가 자신을 위로해주고 이 고통이 끝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체득하게 됩니다. 이렇듯 출생 직후부터 아기는 사소한 좌절이 극복되는 반복된 경험을 통해 욕구불만을 견디고 안정을 되찾는 능력을 획득하게 됩니다. 바로 좌절 내성(frustration tolerance)입니다. 이런 능력은 아기가 발달해나가면서 맞닥뜨리게 될 많은 시련과 실패를 견딜 수 있게 만드는 기초가 됩니다. 또한 현재의 고통이 언젠가 끝나고 편안해질 거라는 세상에 대한 긍정의 태도를 형성시킵니다. 자기심리학(Self Psychology)의 창시자인 미국의 정신과 의사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은 아기의 마음이 건강하게 발달하기 위해서는 최적의 좌절(optimal frustration)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최적의 좌절이란 아이에게 심리적 외상의 후유증을 남기지 않는 정도의 만족지연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원하는 것이 충족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력감이나 공황상태에 빠지지 않고 어느 정도의 불편함과 불안을 견딜 수 있게 됩니다. 사소한 좌절 상황이나 엄마가 아기 옆을 잠시 비우는 경우에 저항하고 떼를 쓸 수 있겠지만 전처럼 달래주지 않아도 금세 잠잠해지곤 합니다. 바로 최적의 좌절이라는 교육적 경험 때문입니다.

 

물론 아이에게 좌절이 필요하다고 해서 모든 좌절이 유익한 것은 아니겠지요. 잠시 기다리면 조용해지던 아기의 우는 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불안하고 겁에 질린 울음소리인데도 부모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안심시켜주지 않거나 아이가 유리잔, 탁자 장식품, 손위 형제들의 비싼 장난감 등에 손을 댔다고 하여 겁을 먹을 정도로 무섭게 혼을 내거나 체벌을 하는 경우가 되풀이 된다면 아이는 최적의 좌절이 아니라 마음에 상처가 생기는 외상적 좌절(traumatic frustration)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무력감과 공포로 인해 주눅이 들고 위축되어 건강한 발달이 저해될 겁니다.

 

따라서 완전히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유아기 시절부터 ‘최적의 좌절’은 필수적입니다. 허둥대며 기저귀를 갈아주는 초보 엄마의 다급함이 필요하고, 응원의 뽀뽀를 받은 돌쟁이의 걸음마 실패가 필요하며, 울화통을 터트리며 장난감을 집어던지는 아이를 부드럽게 안아들고 ‘안 돼’라고 말하는 아빠의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두 돌배기 정도가 되어 충동을 자제하고 자기 조절이 중요해지는 시기가 오면 아이에게 허용할 수 없는 행동을 금지시키면서 왜 안 되는지를 설명해 주고 정서적으로는 아이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가벼운 불편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달래주기 위해 부모가 즉시즉시 나타난다면 아이는 참을성을 기를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 않을까요. 요컨대 최적의 좌절을 반복하면서 아이는 좌절에 대항하는 힘을 갖추게 됩니다.

 

안전하고 완벽했던 엄마의 자궁을 벗어나 험난하고 불완전한 세상에 태어난 순간 이후부터 인간의 삶에서 좌절은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건강한 성숙을 위한 불가결의 조건입니다. 그리고 모든 아이는 이런 좌절이 주는 고통에 저항할 권리가 있습니다. 좌절을 허락할지 말지는 부모의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하기에 초보 부모라는 이유로, 워킹맘이라는 이유로, 경제적 여건이 열악하다는 이유로 자녀의 좌절을 막지 못했음에 자책하거나 절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아이가 얼마만큼 견딜수 있는지, 그래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언제 정말로 부모의 ‘달램’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는 세심한 관심과 애정이면 충분합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녀의 출생과 동시에 가장 훌륭한 좌절내성 트레이너가 되는 것입니다.

 

 

조성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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