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장원의 ‘직장 남녀를 위한 오피스 119’ <4>

[정신의학신문 : 시청역 민트 정신과, 조장원 전문의] 

 

진료 예약이 되어 있는데도 매번 20~30분가량 일찍 와서 기다리던 환자가 있었다. 그렇게 빨리 와서 한참을 기다려 놓고는 진료실에 들어오면 오히려 상담 시간 내내 죄송하다는 말을 계속했다. 이런 것까지 여쭤봐서 죄송해요, 말이 너무 장황해서 죄송해요, 시간이 자꾸 길어져서 죄송해요, 이런 식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남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님, 날씨도 추운데, 종일 환자들 진료하느라 정말 힘드시죠?”

몹시 춥던 어느 날, 그분은 진료실로 들어서면서 이렇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내가 상담을 받는 건지, 그분이 상담을 받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친절이 몸에 밴 분이었다.

‘이제 또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면 한 주 동안 얼마나 많은 착취를 당하면서 살아갈까?’

해맑은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서는 그분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직장 내에서 만능 해결사로 통한다. 부서 내에서 하기 싫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모두 그녀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직원들은 언제나 그녀를 쳐다본다. 그녀는 자기 일이 산적해 있으면서도 거절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일을 맡는다. 다른 직원에게 부탁받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그녀는 거의 매일 야근을 한다. 때로는 주말까지 나와서 일할 때도 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부탁을 모두 들어주지만,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거나 그녀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를 알아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어이없는 건 처음에는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며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다른 사람을 먼저 챙기는 그녀는 점점 지쳐가고 있다.

 

“너는 왜 그렇게 미련하게 사냐? 당당하게 거절해. 너부터 챙기면서 살아야 하는 거야.”

그녀에게는 고민을 털어놓으면 잘 들어주고 자기를 알아주며 위로해주던 선배가 있었다. 그런데 한 번은 그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기를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뜻밖이었다. 고민 끝에 용기를 낸 그녀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 선배라면 충분히 이해해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거절당한 선배의 반응은 참으로 의외였다.

“다른 사람 부탁은 다 들어주면서 왜 내 부탁은 거절하는 거니? 너 진짜로 섭섭하다.”

선배는 자신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충격이었다. 인간에 대한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 뒤 그녀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 상담 치료를 받게 된 것이다. 
 

사진_픽셀


이처럼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상대가 누구든 어떤 요청이든 거절이 어려운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나의 욕구보다 타인의 욕구가 우선시 된다. 나아가 나의 욕구를 타인의 욕구보다 우선시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일이라고까지 생각한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게 자신의 유일한 기쁨인 이런 사람을 나는 ‘나착해 씨’라고 부른다. 나착해 씨는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일 외에는 자기가 뭘 해야 기쁘고 행복한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다. 이들과 상담 치료를 진행하다 보면 공통으로 해당하는 과거의 경험이 있다.

 

위 사례의 나착해 씨 경우, 오빠가 문제였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 사고만 터졌다 하면 오빠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오빠 뒤치다꺼리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래도 네가 있어 정말 다행이야. 너라도 없었더라면 엄마는 어떻게 살까 싶다.”

나착해 씨는 어머니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때마다 그녀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 나라도 엄마한테 잘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를 힘들게 하면 안 돼.’

나착해 씨는 오빠와 달리 어머니에게 언제나 착한 딸이어야만 했다. 그녀의 모든 삶은 점점 어머니를 위한 삶으로 변화했다. 자기 생각과 행동의 기준점이 어머니가 된 것이다. 

어머니의 욕구가 자신의 욕구가 되어 버린 나착해 씨는 성인이 되어서도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채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런 환자를 대할 때면 나는 의사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나착해 씨 같은 경우, 분명 치유의 대상이다. 어떻게 치유하는 게 가장 바람직할까?

 

우선 거절을 한 번 해봐야 한다. 거절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기에 그렇다. 이들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엄청나다.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면 그것으로 둘 사이의 인간관계가 파탄에 이를 것이라 지레짐작한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는 순간, 그 사람이 화를 낼 게 분명하고, 다시는 만나기 어렵게 될 거라 예단하는 것이다.

거절을 위한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거절하기 쉬운 상황을 만들고, 거절해도 될 만한 상대방을 물색하며, 거절에 이르는 구체적인 대화를 연습한다. 내가 거절했을 때 상대방이 화를 내거나 거세게 맞받아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대처할지까지 미리 생각해두는 게 좋다. 마음 단단히 먹고 거절했는데, 오히려 역공을 당해 상처를 입으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다음 자신이 거절당했을 당시의 심정을 반추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분들은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해 본 적이 없지만, 자신들은 살면서 숱하게 거절을 당해봤기 때문이다. 

“거절당했을 때를 회상해 보니 뭐 그렇게 크게 불쾌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괜찮아지더라고요. 별일 아니었어요.”

그렇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대개 비슷하다. 거절당하면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다가도 금방 잊어버린다. 거절하는 쪽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도 이내 평상심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그만한 일로 인간관계가 파탄지경에 이르기는 어렵다.

정신과 전문의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나착해 씨가 거절할 수 있게 용기를 주는 일이다.

 

끝으로 자신의 인간관계를 차분히 돌아보고 자신과 타인과의 경계를 좀 더 분명하게 설정하는 게 좋다. 여기까지는 내가 기꺼이 해줄 수 있지만, 그 선을 넘으면 절대 해줄 수 없다는 경계선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회사 업무를 예로 들자면 30분 이내에 처리가 가능한 간단한 일은 누가 도움을 요청하면 들어줄 수 있으나 30분이 넘게 걸리는 복잡한 일은 누가 부탁하더라도 정중히 거절한다, 이런 식으로 자신만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해 놓으면 된다. 

그런데 경계선을 그을 수 없을 만큼 이미 강력한 관계가 형성된 경우가 있다. 아무리 거절해도 막무가내로 부탁을 계속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단언하지만 그런 관계는 건강하지 못한 관계다. 누구는 일방적으로 부탁을 강요하고, 누구는 일방적으로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관계라는 건 전혀 상식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런 관계는 무조건 끊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신의 정신건강을 끝없이 해칠 가능성이 있는 관계다. 앞으로 얼마든지 건강하고 상식적인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 된다. 세상에는 나착해 씨처럼 건강하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착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면 세상은 충분히 살만한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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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민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나를 지키는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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