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숲으로 가는 길] 2부 - 내 마음과 마주하기

12화 사람에게 상처 받은 당신을 위한 몇 마디

 

어디를 가야 당신을 만날 수 있는가. 

나는 상처 받은 사람에게 수만 개의 단어보다 깊은 포옹을 한 번 해주고 싶다. 마음으로는 당신을 깊게 안아줘도 실제로는 불가능할 것이기에 너저분하게나마 글로 대신해 본다. 

 

어느 날, 알고 지내던 S 동생이 연애상담을 하고 싶다고 진지하게 나를 불러냈다. 나에게 누구와 사귄다고 말은 안 했지만,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정작 만나니, 누구와 사귀었다고 쉽게 고백했고 그것은 상대방에게 강제 커밍아웃이 되어버렸다. 그렇다 그 둘은 여자였다. 나는 별스럽지 않다는 듯이 고민을 들어줬다. 그렇지만, 상대방을 알고 있는 나에게 공개적으로 상대방의 사생활을 떠벌리는 모양새가 좋지 않아 불편감이 있었다. 

그렇게 카페에서 한두 시간, 산책을 하며 한 시간 가량 시간을 보냈고 나는 성심성의껏, 조심스럽게 둘의 사정을 고려하며 상담을 해줬다. 걷다 보니 운동화 신발 끈이 풀렸고, 마침 앞에 있던 돌덩어리에 발을 올려 신발 끈을 다시 맸다. 그 순간이었다. 

“언니는 참 말이 많아요.”

뒤통수를 가격 당한 기분이었다. 그랬지, 커밍아웃한 너희 둘 민망할까 봐 내가 이래저래 질문도 많고 대답도 많았지. 그 상태로 여차여차 헤어지며 택시를 탔다. ‘말’이 많다고? 그래 나도 잘 안다. 그래도 상담하자고 부른 아이가 헤어지며 던질 말은 아니라고 본다. 당황했다.

돌아오는 택시에서 오만가지의 생각이 교차됐다. 슬프기도 했다.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였던 거지? 되려 저 아이 말이 맞을지 몰라. 남들은 예의를 차려 참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 이후, 모임이나 만남에서 최대한 말수를 줄이려고 노력 중이다. 어쩌다 말을 주도적으로 많이 한 날은 돌아오는 길에 정신적인 자학을 많이 했다. ‘멍청이, 상대방이 그걸 몰랐겠어? 왜 그렇게 말이 많냐고!’ 대화를 하다가 합이 잘 맞아 신이 난 상태에서 나는 나를 차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점점 모임이나 만남이 재미 없어졌다. 모임 이후에는 자학적 순간이 길어져, ‘아, 이런 게 트라우마인가?’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말 한마디로 나 자체를 흔들어버리다니. 많이 아끼던 동생이었는데, 이제 이름만 들어도 마음속에 불덩이가 타오른 것처럼 괴로워졌다.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긴 시간을 홀로 참고 견디다가 K와 I에게 말했다. 난리가 나버렸다. ‘괘씸하다’부터 시작해서, ‘S에게 자신들도 상처 받은 말이 많다’며 S의 경솔함에 대하여 질책했다. 마음이 나아지지 않았다. 
 


말 한마디로 상처 받은 나처럼 사소한 일부터, 더욱더 커다란 일까지 내상을 입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물론 이보다 큰일도 많았다. 사람은 여리다. 상처를 받으면 그 즉시 겉으로 화를 내뱉는 듯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내 잘못이 없었는지 자기 검열을 시작한다. 자기 검열을 반복하다 보면 찔리는 구석이(그런 성향이) 있기 마련이고, 그러함에 경악한다. ‘내가 정말 저렇게 무례한 사람의 말처럼 그러하다니···.’

어쩌면 남에게 가스라이팅(Gaslighting :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을 당해서 자존감이 낮아진 경우도 많을 것이다. 정서적 학대이다. 자신의 행위가 스스로 틀렸음을 인정해야 하고 ‘나는 별것 아닌 존재이구나.’를 반복적으로 이입시키게 한다. 나는 주로 연애하는 사이에서 이런 경우를 자주 봤고, ‘그게 아니잖아, 넌 왜 그것도 모르니?’라고 던지면 ‘아, 그런가?’라고 반사적으로 자신을 의심하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사랑하는 행위가 나의 자존감을 낮게 만들다니, 무척 슬픈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사회관계 망을 통해 ‘나’ 자신의 성향과 성격과, 어쩌면 자존감까지 확인한다. 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늘 위태롭다. 견고하다고 믿고 싶은 것뿐이다. 타인이 하는 말이 나에게 비수가 되어 꽂히는 일은 너무 순간적이고 쉬운 일이다. 

그렇다고 반사회적인 인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를 비춰볼 작은 거울들을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사람 하나가 수 명의 정신과 의사 선생님보다 나을 수도 있다. 그 안에 정서적 학대가 없다면 말이다. 내가 믿는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든든하고 행복한 일이다. 그 안에서 나를 찾기도 한다. 꽤 근사한 일이다.

모임을 피해 다니던 내가 오랜만에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이유를 이야기했다. 모두들 인상을 찌푸리며 ‘아니야!’라고 해주었다. 좋은 친구들이다. 그리고 어떤 친구들은 내게 자신들이 얼마나 의지하는지를 표현해주었다. 감동적이었다. 나 스스로를 보듬게 될 것 같았다. 오랜만에 사회적 관계에서 포근함을 느꼈다. K와 I의 말이 맞음을 다시금 확인하고 그들도 떠올랐다. 

사람으로 상처 받아 굴속으로 숨어들었다면, 그건 다시 사람으로 나아야 한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쉬운 해결책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위의 말은 변치 않는 진리이다. 우리는 그것을 다시 꺼내 깨달아야 한다. ‘사람’을 찾자. 내가 믿으면서 동시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주는 사람.

 

다시 말하지만, 이런 너저분한 내 이야기로 당신의 다친 마음이 나아질는지 걱정이 앞선다. 만약, 내가 당신을 알고, 당신이 나를 믿어준다면 우리는 아주 근사한 사회적 관계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저 멀리에서라도 큰 포옹을 건네겠다. 

오늘도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 한가운데에서 수고가 많았다. 받은 상처는 이곳에 다 풀고 가길 바란다. 홀로 아픔을 끌어안고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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