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숲으로 가는 길] 2부 - 내 마음과 마주하기

10화 글을 쓰며 마주하기 

 


글을 읽을 수 없었다.

20대 후반 어느 날부터였다. 나는 크게 좌절했고, 화가 났다. 우울하고 불안한 것도, 자살하고 싶은 마음을 달래는 것도 힘에 부친데, 이제는 글도 읽을 수 없다고? 숨이 콱 막혔다. 선생님은 흔치는 않지만 우울증과 불안증의 증세가 영향을 준 것일 수 있다고 하셨다. 

 

어릴 적부터 나와 책은 단짝같이 움직였다. 부모님께서는 책을 구매하는 비용에는 돈을 아끼지 않으셨다. “늦었는데 어디냐?”라고 전화하시곤 했는데, 서점이라고 답하면 방해하지 않으셨다. 집 앞에 작은 서점은 나의 단골 서점이었다. 매우 어려워 보이는 책을 사보기도 했고, 어려운 책을 실패한 후에는 적절한 수준의 책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몇 차례 이사를 갈 때마다 책은 이삿짐 나르시는 분들께 큰 골칫덩어리였다. 그렇게 모나고 뭉개진 책을 다시 밤새 읽었다. 밤낮없이 책을 읽었는데, 국어시간에도 책을 몰래 읽었다. 눈치챈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주의를 주셨다.

반면 쓰는 것은 산발적으로 썼다. 무슨 일이든 새로 시작할 때는 노트와 새 펜을 사곤 했다. 그렇게 쌓인 노트들에 편지를 쓰듯이 일기를 썼다. 한 페이지 분량에 내 근래의 마음을 가득 담아 쓰고 날짜를 쓰면, 또 몇 주간 잊고 지냈다. 그러다 다른 예쁜 노트에 다시 일기를 쓰는 식이었다. 일기장을 모으면 노트가 산처럼 쌓였다. 그렇다고 찢어서 보관하기엔 영 볼썽사나웠다. 몇 년 전부터는 컴퓨터로 일기를 쓰고 외장하드에 보관하는 식으로 바꾸기도 했다.

근래에 오래된 여러 장의 종이일기를 다시 읽었다. 하루 일과를 나열하듯 써놓은 것도 있고, 특별하게 본 공연 티켓을 붙여놓은 페이지도 있었다. 엄마를 원망하는 글도 간간히 보였다. 대부분의 글이 어둡고, 외로웠다. 

 

병원을 다니며, 선생님께 내가 하소연한 것도 “글을 읽을 수가 없어요.”였다. 선생님은 필사(글을 베끼어 쓰는 행위)를 추천하셨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교 때 과제로만 했던 필사를 다시 하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용기 내 한 번을 한다고 해도,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지질 않았다. 실패다. 

“필사는 정말 답이 아니다.”라고 표현하니 선생님께선 일기를 추천해주셨다. 일기라… ‘수십 번을 수십 권에 쓴 일기를 꾸준히 써보라고?’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검사를 받는 일기라니, 다 큰 어른이 일기를 검사받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수줍기도, 나쁜 말로 수치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해야 했다. 나는 나아져야 했고, 글을 읽을 수 있어야 했다. 글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은 나를 매우 간절하게 만들었다. 처음엔 서먹했다. ‘내 하루가 뭐 별게 있다고 매일 쓴담…’ 

 

우선, 날짜를 쓰고, 일어나는 시간을 쓰고 끝났다. 그리고 어떤 날은 K와 I가 저녁을 사준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그렇게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나의 둘레를 써 내려갔다. 어떤 날은 우울증이 깊게 다가오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는 감정과 생각들을 간결하게 썼다. 

선생님은 간결한 단어들을 구체적으로 ‘문장’이 되게 적어보라고 하셨다. 들켰다. 내가 남이 읽는 일기에는 마음을 많이 안 담고 있었던 것을 들켰다. 난감한 마음이었다. 단어들을 문장으로 만들어 갔다. 다시 새로운 요청이 있었다. 포괄적인 표현을 구체적으로 바꿔보라는 것이다. 또 들켰다.

이제는 피할 곳이 없었다. 나는 최대한 솔직하게 하루 종일 느껴지는 내 감정을 구체적으로 적어 내려갔다. 그 와중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내 마음을 마주 보기’를 수년간 제대로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외부에서 다가오는 외로움과 우울한 감정과 싸우기만 했지, 정작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면하고 무시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잘 들어주면서 내 마음의 흐름은 모르는 채 했다. 
 


지금도 이 행위는 나에게 매우 어렵다. 하지만 시작하는 방법은 똑똑히 알게 되었다. 바로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나는 지금 의자에 앉아있다.’로 시작하는 것이다. 현재 내가 어떤 곳에 있는지부터 인지한다. 현재의 내가 있음에 어제의 고됨을 견딘 나도 있는 것이고, 내일의 나도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느껴지는 감각을 가볍게 생각한다. ‘배가 고프다.’, ‘물이 마시고 싶다.’라거나 ‘긴장되어있다.’, ‘한 것도 없는데 왜 피곤하지?’등으로 옮겨간다. 또다시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마음은 어떤데?’ 하고 묻듯이 말이다. 

‘괴로워.’하면 ‘어떻게 괴롭니?’로 옮겨가고 ‘왜 그럴까?’로 옮겨간다. ‘이유 없이 짜증이 나.’하면 정말 이유가 없는지 자신에게 한 번 다시 묻고, ‘이유 없이 짜증이 난다.’라는 마음 자체를 존중해주는 일이 필요하다. 굳이 억지로 외부의 힘이 감정을 몰아세워 바꾸지 말고, 존재하는 감정 자체를 인정해주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날씨를 적듯 적어 두는 것도 좋다. 

- 상태 : 흐림 (이유 : 오늘 아침 가족과 말다툼함)
- 마음 : 뒤숭숭함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고, 학교 과제 (혹은 회사 업무)를 말끔히 해내지 못함)

이런 식으로 간단히 메모하여, 주간 달력에 쓰면 주별 나의 컨디션과 마음의 흐름, 월별 달력에 쓰게 되면 월별의 내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어진다. 특히 여성이라면 생리를 전후로 호르몬에 따라 변하는 감정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게 된다.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내가 원치 않는 신체적 불편과 감정이 섞이기 때문이다. 

 

내게 알맞은 새 노트를 사자, 그리고 편한 펜 한 자루를 사는 것도 좋겠다. 그렇게 짧게 시작되는 마음 마주하기가, 쌓이고 쌓여서 당신의 인생을 기록할 것이다. 나는 지금 에세이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게 될지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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