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숲으로 가는 길] 2부 - 내 마음과 마주하기

 

8화 우울하다, 불안하다

 

어느 날,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 복도에서 외침이 들렸다 

“불이에요! 불이 났어요!”

울먹임이 섞인 외침이 반복되고 나는 순간 멍했다가, 몇 초 후 정신을 차렸다. 중요한 것을 집어 들어야 했다. 마침 나는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두른 상태였다. 파자마를 손에 집히는 대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휴대폰, 지갑, ‘하루(이때는 생강이가 식구가 되기 전이었다)’를 안고 뛰쳐나갔다. 1층 앞 대로에는 소방차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하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이대로 서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근처 카페는 강아지를 안고 있는 나는 갈 수 없는 공간이었다. 휴대폰으로 근처 카쉐어링(carsharing : 자동차를 빌려 쓰는 방법 중의 하나로 일종의 공유경제 시스템이다. 십분 단위의 시간으로 빌려 쓸 수 있다) 업체를 검색했다. ‘그린카’, ‘쏘카’… 근처에 두 업체가 검색됐고, 가장 가까운 쏘카를 선택했다. 

머리는 젖어서 산발에, 강아지는 덜덜 떨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나에게 중요한 것이 없었다. 바로 ‘약’이었다. 공황의 전조증상인지, 불안증의 증상인지 모르게 나는 헤매고 있었다. 손과 다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떨렸다. 불안했지만, 강아지를 차에 두고 창문을 살짝씩 열어 둔 채 병원으로 뛰어갔다. 담당 선생님이 안 계셨지만, 그땐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마주한 선생님은 내 상태를 차분히 바라보셨다. 차트를 여셨고,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몇 가지 물어보셨다. 선생님은 하루치 약을 급한 대로 지어주셨다. 병원에서 약을 먹고 다시 차로 뛰어갔다. 차 안이 따뜻했는지, 하루는 엎드려 졸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방차들은 돌아갔다. 같은 층을 쓰는 회사에서 실험하다가 불이 붙었다고 했다. 

 

불안증은 여러 양상으로 나타나곤 했다. 위의 사정처럼 급박하고 위험한 순간에 어떠한 판단을 해야 할 때 와장창 쏟아지기도 하고, 정말 아무 일이 없는데 더 심한 불안이 다가오기도 했다. 미래를 생각할 때면 어김없이 불안증이 도졌다. 손발에, 이마며 등줄기에 땀이 흠뻑 나고, 손발이 차가워지며 심하게 떨렸다. 나에겐 미래에 대한 생각은 트리거(기폭제 : 사전적 의미는 '방아쇠가 발사되다' '폭발하다' 등인데, 트라우마 경험을 재경험하도록 만드는 자극을 의미한다.) 같은 것이었다. 불투명하고 심지어 까맣기까지 한 나의 미래는 불안증과 연결되어 있었다. 
 


우울하다는 감각은 불안증보다 친숙한 감각이었다. 불안증은 그 증상 자체를 자각하기도 전에 마음이 잡아먹혀 버린다. 반면 우울한 감각은 서서히 밀고 올라와서 눈치를 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우울증이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모두 쉽게 ‘나 우울해.’라고 내뱉은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씨앗같이 작은 일상의 우울함이지만 친구나 애인 등 곁에 있는 사람이나 취미 등을 통해 해결이 가능한 수준일 수 있다. 난 전문의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수준에서야 치료를 요하는지 언급하는 것은 위험하다. 

우울증은 한번 오면 잘 떠나지 않았다. 일상 감정 속 밑바닥에 꾸준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떤 때에는 늪처럼 다가와서 나를 자꾸 빠뜨리려고 했다. 내 마음에 찰싹 달라붙어, 벗어날 수 없도록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어떤 때에는 벗어나려고 노력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는 우울증에 졌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일주일이 되는 등으로 길어졌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어떤 순간에 있든지 불쑥 치고 올라왔다. 홀로 있으면 죽고 싶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버리곤 했다. 술을 마시면 마치 바로 실행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죽고 싶은 감정이 우울증을 야기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내 생각엔 ‘사는 것이 별거 없다’는 것을 깊게 깨달을 때 우울증은 시작된다. 열심히 살아도, 대충 살아도, 그런대로 살아도 말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큰 의미가 아니고, 세상사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아득바득 살려고 애를 쓰는가?’ 이런 질문에서 당신의 가슴에 우울증이 피어난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다. 작은 재해에도 쉽게 다치고 죽는다. 스트레스에도 취약하다. 큰 계기가 있지 않고는 잘 변하지도 않는다. 약한 존재는 우울증이 집어삼키기 딱 좋은 상대이다. 치사하지만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 이별을 한 사람, 정체된 사람, 방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는다. 우리는 위의 상황에 쉽게 놓이곤 한다. 우리 인생이 작은 게임이라도 되는 듯 우여곡절은 쉽사리 끝나지 않는다.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우울증이 건네는 질문이다. 사실 이 질문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우리는 존재하기에 삶을 영위한다. 존재 자체가 삶의 목적이자 이유인 것이다. 손발이 떨리고 온몸이 땀으로 젖어도 두 발은 지상을 딛고,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삶 한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도 없이 죽고 싶다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다짐했던 내가 이런 말을 건네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스트레스에 놓인 상황에서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우울이기도 하다. 진정한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보기란 두렵고, 때론 귀찮다. ‘세상 살아가는 것도 힘에 부친데, 내 마음과 마주하라고?’ 자세히 바라보면 그건 우울이라는 단어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구체적이고 섬세한 감정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영원히 당신 곁에 머무는 당신의 마음. 지금은 당신이 당신과 마주해야 할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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