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숲으로 가는 길] 1부. 아팠지만 나는 몰랐다

 

6화 나를 견디게 한 것들 - 3

 

집을 나와 가장 먼저 한 것은 실컷 울고, 자는 것이었다. 짜증이 나면 짜증 나는 표정을 지었고, 우울하면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새 식구 중 누구도 나를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몇 마디 말로 껴안아줬다. 집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었다.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원룸에 다글다글 사람 셋과 강아지 한 마리가 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좁지도 않았고 불편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집을 계약하면서 나오는 길에 건물 1층에 있는 화원에 들어갔다. 거기서 가장 번듯하게 서있는 고무나무를 입주하는 날 가져다주십사 했더니 흔쾌히 응해주셨다. 그때 그 고무나무는 이사를 세 번한 지금도 전신거울에 나를 비추어볼 때마다 근사한 피사체가 되어주고 있다. 
 


고무나무 얘기를 시작하면 식물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본가에서도 나는 작은 식물 몇 포트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집을 피해 다녔고, 고정적으로 돌보기엔 내 기분과 상황에 기복이 심했다. 식물은 자주 죽었고, 나는 자주 절망했다.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느껴졌다.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으니 더 잘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시작한 식물 키우기는 집안을 식물로 가득 채우기에 이르렀다. 처음엔 관엽식물(잎사귀의 빛깔, 모양을 관상하기 위하여 재배하는 식물)로 시작했다. 그러다 선인장과 야자나무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고무나무도 종류가 다양하다는 걸 알고 종류별로 들이기도 했다. 양재동 꽃 시장을 자주 찾았고, 집 근처 식물가게에서 다양한 식물을 신기한 마음에 구입해오기도 했다. 서울 식물원을 구경 가고, 큰 단위의 화원이 있는 화성이나 파주 등으로 나들이 다니기도 했다. 식물을 인터넷으로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도 했다. 

식물로 만나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부드럽고 다정했다. 기본적으로 말투부터 표현하는 단어까지 모두 상냥했다. 모나게 자란 잎사귀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면, 모두가 특별하다고 기쁘게 바라봐 주는 곳이었다. 모나고 부족한 나라는 사람도 그렇게 보아줄 것 같았다.

 

식물보다 손이 많이 가는 존재는 강아지다. ‘하루’라는 스피츠 종의 강아지는 ‘서울 유기동물 입양센터’에서 입양했다. 기존에 몰티즈를 키웠기 때문에 몰티즈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강아지를 보러 들어갔는데, 엉망으로 털이 깎인 스피츠 한 마리가 쭈그려 앉은 내 허벅지쯤에 몸을 붙이고 앉아 덜덜덜 떨었다. 사람은 무척 좋아해서 부르면 단박에 달려오는데, 강아지를 무서워해서 강아지들을 뚫고 오지는 못했다. 많은 고민 끝에 소심한 스피츠를 새 식구로 맞이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는 우리 집 막내가 되었고 나는 그녀의 엄마가 되었다. 함께 살아서 내 식구가 된 K와 I도 무척 좋아했다. 그 부분은 지금도 고맙고 고맙다. 

하루가 집에서 적응을 마칠 때쯤, 한 여름에 I가 다니는 학교 창고에 어떤 사람이 강아지 한 마리를 버리고 갔다고 했다. 처음엔 못 들은 척했다. 사료나 가져다주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더운 날씨는 계속됐고, 날이 갈수록 기록이 경신되고 있었다. 창고에 물 한 바가지, 사료 한 바가지, 대소변과 목줄에 묶인 강아지가 섞여서 난장판이라고 했다. 

생명을 그렇게 버린 사람을 저주하며 강아지를 우선 씻기기로 마음먹었다. 집에 데려와 열심히 씻기고 보니, 피부병이 심하게 걸려있었다. 나이도 7살, 누구도 반가워하지 않을 나이였다. 센터에 맡기면 공고 일시가 지나서 안락사당할 게 뻔했다. 유기견 카페에 입양 글을 썼다. 하지만 피부병이 심해서 여기저기 땜빵이 생긴 7살짜리 강아지를 품어줄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니, 아예 없었다. 

강아지를 싫어하는 하루가 있는 집에 강아지 한 마리를 더 들이는 건 모험에 가까웠다. 잘못 꼬이면 서로 물어뜯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우선 병원 진료를 받았다. 유기견을 구조해왔다고 하니, 병원에서는 최선을 다해 내 금전적 부담을 덜어주셨다. 집을 나오고, 나는 혼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세상에는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좋은 사람들이 곳곳에 존재했다. 

집안 식구들 모두 모여 회의를 반복했다. 꽤 여러 차례 회의를 했다. 짖음도, 태어날 적부터 있었던 피부병도 심한 강아지를 집안에 들여서 우리가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 고민했다. 끝내 우리는 운명이거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 집으로 왔을 때는 이유가 있을 거야.’라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발랄한 성격과 톡 쏘는 고집 때문에 그 아이의 이름은 ‘생강’이로 지어졌다.

그 이후 나는 너무도 심한 우울과 무기력증에 빠져도, 아이들 사료를 줘야 했기에 일정 시간에 움직였다. 소변 대변도 처리해줘야 했다. 내가 일어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내 품에 푹 안겼다. 나는 깊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쉽게 동물을 입양하는 것은 좋지 않다. 나의 경우는 K와 I가 있었고, 그들이 매일 한 마리씩 산책을 시켜주고 놀아주는 몫을 다 해주었다. 나는 최소한의 양육(사료주기, 대소변 정리해주기, 예뻐해 주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다만 우울증이나 불안증이 심각하지 않고, 하루 30분 정도 산책은 충분히 가능한 경우라면 입양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마음 빈 곳에 서로 사랑을 채워줄 수 있고, 매일 이어지는 산책은 우울 증세를 훨씬 나은 방향으로 이끌 것이다. 

 

본가에서 나오면서 나는 홀로 이를 악물고 살아갈 생각을 했다. 그 생각 한편에는 홀로 이 세상을 뚫고 가야 한다는 두려움도 섞여있었다. 나는 정작 무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힘들어하고 슬퍼하는 것뿐이었다. 큰 결정을 내릴 때마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홀로가 되고 나니 병의 증세들이 미묘하게 더 심해졌다. 

그때, K와 I가 나를 밀착 경호했고, 부동산 사장님이 엄마처럼 챙겨주셨고, 동물병원 의사분부터 화원 주인 분들마저 나를 금세 단골처럼 친절히 대해주셨다. 정신병원은 무기력으로 자주 지각과 결석을 했는데, 원망보다 염려를 해주셨다. 나는 수많은 곳에서 뜻밖의 호의를 받았고, 강아지들의 엄마로 살아가며 무한의 사랑을 받았다. 세상은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사랑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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