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숲으로 가는 길] 1부. 아팠지만 나는 몰랐다

 

3화 아팠지만 나는 몰랐다 - 2

 

나는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집을 좋아하고, 밖에 나갈 일이 생기면 해야 할 일 들을 빨리 처리하는 마음으로 해치우곤 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흔히들 ‘집순이’라고 부르길래 내가 그런 사람인가 보다 했다. 아무도 있지 않은 집에 홀로 있으면 아늑하고 포근했다. 안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추우면 춥다고, 더우면 덥다고 나가지 않았다. 

동시에 나는 집에 돌아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외출 후 집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점점 느려져 집 앞에서 종종 멈추곤 했다. 집은 부담이고 긴장이었다. 집 밖에서는 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원하는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사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도 내겐 큰 매력 중 하나로 느껴졌다. 집에선 큰 소리를 내선 안 됐고, 방문을 닫는 것에도 꼬투리를 잡히곤 했다. 

나는 참으로 게을렀다. 약속을 잡으면 빠듯하게 준비했고, 별일이 없는 날은 오전 열한 시까지 자곤 했다. 어느 때에는 이런 내가 걱정이 돼서, 아르바이트를 해봤다.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카페였고, 나는 매장 오픈 시간에 일했다. 다행히 나는 일에 있어서는 철저했다. 힘겹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20분씩 일찍 도착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일을 그만두고 난 후 원래의 빠르게 돌아왔다. 

집에 있을 땐 주로 누워있었다. 왼쪽으로 누워있다가 몸이 배기면 오른쪽으로 돌아눕는 식이었다. 누워서 잘 일어나지 않았다. 앉아있는 일도 드물었다. 

 

 

오후 네시쯤 창문을 열면 건너편에 고양이가 보였다. 검은색 털에 흰 턱받이를 한 것처럼 가슴팍이 하얬다. 나는 그 아이를 ‘바지’라고 부르곤 했다. 

여름엔 얼음 넣은 물을 주고, 겨울엔 뜨거운 물그릇을 스티로폼에 담았다. 먹을 것도 종종 주곤 했지만, 엄마의 불호령이 두려워 사료를 사지는 못했다. 나 또한 내가 바지를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간식과 캣닢을 종종 선물해주곤 했다. 특히 캣닢이라는 잎이 담긴 주머니를 선물했을 때 바지는 마당을 뒹굴며 ‘아옹아옹’ 소리를 냈다.

하지만 금세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친한 언니 K와 친한 동생 I에게 수시로 메시지를 보냈다. 그 외의 사람에겐 연락을 하지 않았다. 끊었다고 표현하면 적당할 정도로 아무와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잘 지내냐는 안부인사조차 부담스러워서, 그런 연락이 도착하는 날이면 ‘고맙지만, 미안해.’의 마음으로 적당히 답해 넘기곤 했다. 나의 동동거리는 마음은 그들에게 차가운 거절로 느껴졌으리라 짐작했다.

 

누워서는 강아지 등을 쓰다듬으며 종일 휴대폰을 쳐다봤다. SNS를 하며 남 사는 이야기를 구경해보기도 하고, 뉴스를 읽으며 나라 돌아가는 모양을 파악하곤 했다. 메시지도 순간 끊기고, 볼 것도 없는 순간에는 천장을 바라보고 바로 누웠다. 그리고 울었다. 뭐가 그렇게 슬픈지 눈물이 끊이지도 않고 흘렀다.

‘나는 누구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오래지 않아 K나 I에게서 온 메시지 알림 소리에 다시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다. K와 I는 친하게 지낸 지 오래된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들을 둘도 없는 친구처럼 여겼고, 이들은 나를 가족 이상으로 대해줬다.

그들은 나를 집 밖으로 이끌어내기에 열성이었다. 핑계는 많았다. ‘옷을 사려는데 같이 봐줘야 한다.’부터 ‘맛집을 찾아냈으니 같이 가자’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면 나는 하루 종일 굶다시피 하다가 퇴근한 그들과 폭식하듯 저녁을 먹었다. 

 

어느 때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창문을 활짝 열고 빨래도 돌리고, 방의 묵은 먼지를 털어냈다. ‘내가 어떻게 여기에서 지냈지?’ 하고 스스로 쯧쯧 하고 질책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쌓아 두고 읽지 못한 책들을 작가별로 정리했다. 
 


말끔하게 씻고 잠옷도 뽀송하게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방바닥을 벅벅 닦으며 헤매던 날의 나를 지우듯이 열심히였다. 그러다가도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이 ‘퓨욱’ 하고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분 좋은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분 좋은 순간이 찾아오면 나는 그것이 사라졌을 때의 공허함을 상상하며 기쁨이 다가와도 두려워하게 되었다. 

 

어느 날부턴가 글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같은 줄을 여덟 번이고 열 번이고 읽었는데 이해되지 않은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책, 다음 책, 잡지와 편지까지 뒤져서 읽었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특히 소설은 손도 대지 못했다. 감정이입이 전혀 되지 않았다. 작가의 묘사가 상상되지 않았다. 중, 고등학교 시절 새벽 3-4시까지 책을 읽다 잠들던 때를 기억해보면 끔찍한 악몽에 던져진 것 같았다. 억울했다. 스스로 나사 빠진 사람 같다는 건 인정했지만 이렇게 내 생활에 밀착해서 다가올 줄은 몰랐다. 

종종 왼쪽 귀가 먹먹하게 들렸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슬슬 적응을 했다. 증세도 길게 가지 않았다. 나아지겠지 하는 방치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SNS에서 이 증세가 우울증과 연관되어 있을 수 있으며, 심해지면 청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유언비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회피했지만 불안함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지도 어플을 열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력했다. ‘정신병원.’ 기다렸다는 듯이 주르륵 목록이 펼쳐졌다. 그리고 병원들을 하나하나 클릭해보았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였다. 개중에는 ‘여의사’를 강조해 둔 곳도 있었다. 잘못된 것을 검색이라도 한 것처럼 어플을 닫았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물어봤다.

‘정신과에 가볼까 하는데…’ 

의외로 친구들은 마냥 반가워하지 않았다. K는 “원한다면 가봐.”라고 했고, I는 “운동 같은 것으로 바뀔 수 있지 않겠어요?”라고 되물었다. 나는 홀로 작은 섬 한가운데 다 찢어진 깃발을 꽂고 나를 응원해줄 사람을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다음 언젠가…’로 미루려는 차에, 나에게 힘을 준건 뜻밖에 SNS에서 발견한 정신병원을 다니는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담이었다. 그들은 나와 비슷했고, 다르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지금 내겐 ‘한 번의 용기’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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