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숲으로 가는 길] 1부. 아팠지만 나는 몰랐다

 

2화. 아팠지만 나는 몰랐다 - 1

 

나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저 종종 멍하니 있는 일이 많았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다. 늘 두통에 시달렸고, 짜증을 조절하기 힘들었다. 약속을 잡아 두고 당일이 되면 못 나갈 것 같은 두려움이 목을 조르곤 했다. 잠은 늘 새벽에 찾아왔는데, 두 시가 세 시가 되고, 세 시가 네 시가 되더니, 아침 일곱 시로 정착했다. 늘 미지근한 마음으로 살아갔다. 그런 나에게 실망하면서 앞선 것들을 되풀이했다. 

어느 날,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대체 언제부터 이랬을까? 매일매일 이렇게 살아서 이젠 몸에도 마음에도 익어버린 습관들이 내 삶을 집어삼켰다. 그렇다면 언제 집어삼켜졌을까? 아니, 언제부터 시작된 일일까? 

 

이런 질문을 하니 문득 생각나는 어릴 적 장면이 있었다. 

“엄마 나 머리가 너무 아파. 머리가 터질 것 같아.”

하면 엄마는 당신의 다리에 나를 눕히고 이마에 손수건을 올려주었다. 

내 기억으로 두통은 적어도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도 한참 후 엄마 손에 이끌려 대학병원을 찾았다. 어느 과였는지 모르겠다. 병원 복도에서 한참을 기다리며 엄마는 계속해서 어렵게 예약해서 찾아온 것을 강조했다. 이번에 꼭 나아 가리라는 굳은 다짐의 눈빛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안심시켰다. 

의사 선생님은 50대 중반쯤 돼 보였다. 엄마는 그 당시 고가의 검사였던 MRI나 CT 촬영을 요구했다. 머릿속에 무슨 문제가 있지 않고서는 어린애가 왜 매일같이 두통으로 울 수 있냐는 게 이유였다. 나는 옆에서 크게 끄덕였다. 의사는 엄마에게 

“돈 많으세요, 어머님?”

하고 물었다. 엄마는 애매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것이었다. 

 

의사는 엄마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고 했다. 나는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지금 생각해도 이유는 모르겠다. 남과 단둘이 있는 것인데, 오히려 긴장되지 않고 의사에게 집중했다. 의사는 여러 가지를 물었다. 지금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꽤나 많은 질문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을 내게 던졌다. 

“엄마 아빠랑 사는 데 힘든 것이 있니?”

나는 머뭇거리며 아주 잠깐 사이에 작게 ‘끄덕’ 한 번 하고 모른 채 했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주먹을 꽉 쥐며 참아냈다. 그게 전부였다. 의사는 보호자를 불렀고, 처방을 바로 내주었다. 

“병원에서 나가는 길 오른쪽에 빵집이 있어요. 거기에서 맛있는 빵 몇 개를 스스로 고르게 해 주세요. 나오신 김에 짜장면이라도 드시고 들어가셔도 좋겠네요.”

평소라면 나와서 욕이나 한바탕 했을 엄마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유명한 의사 선생님’이라는 권위는 아주 대단했던 것이다. 결국엔 빵도 짜장면도 먹고 들어오지 않았지만, 나는 내 머릿속에 무서운 것이 자리 잡고 있지 않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머리 말고 마음속이 문제라는 것을. 
 


아이는 기대보다 영리했지만, 기억력은 좋지 못했다. 나는 여느 아이처럼 마음에 병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고, 이십여 년을 돌고 돌아 문제의 원인을 알게 될 때까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제 와 분명하게 알게 된 사실은, 그때 그 어린이가 지금의 어른이 될 때까지 꾸준히 이름도 모를 마음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릴 적 나는 진취적이고 목소리도 키도 큰 강단 있는 아이였다. 하지만 집에서는 방구석에서 자는 것을 선호하고, 불을 켜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 외롭고 괴롭다는 느낌이 자꾸 찾아왔다. 그리고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사라진다면 엄마는 자유로워질까?’

 

집은 매일 시끄러운 싸움 소리로 가득했다. 매일이라고 단언하는 이유는 아빠가 자리를 피해 조용했던 날도 엄마의 울음소리 때문에 내 속은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준비되지 않은 부모의 흔한 신혼 싸움이 아니었다. 둘은 정말 지구 상 그런 적수가 없다는 듯이 포효하며 싸웠다. 

아빠는 강단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들 결혼을 하길래 했는데, 아이가 둘이나 생겨버렸는데, 아내와 아이 둘의 가장으로 바뀔 최소한의 책임감조차 없었다. 준비되지 않은 가장의 선택은 한겨울 야자나무처럼 위태로웠다. 그렇다고 가족을 끊어내는 강단이 있지도 않았다. 아빠는 아빠이기도 했고, 내가 싫어하는 남자이기도 했다. 아이 둘을 키우며 엄마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고, 어떤 날은 나에게 

“널 임신해서 내가 도망도 못 갔어.”

라고 퍼부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동그란 눈에서 동그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그렇게도 잘 산다는, ‘아빠 닮은 딸’이었고, 그것은 엄마에게 원망의 대상이 되기에 아주 좋은 빌미였다. 눈물이 2-3초 흐르기도 전에, 운다고 혼이 났고, 서러워서 무서워서 울음을 멈추었다 울었다를 반복했다. 

나는 나 스스로가 큰 트라우마의 현장에 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몰랐기에 참았다.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또한 이러한 삶이 내 평생의 삶에 영향을 미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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