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박종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가정 폭력이란 가족 구성원 사이의 신체적, 정신적 또는 재산상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를 말한다. 가정구성원은 배우자와 과거 배우자였던 사람, 직계존비속, 동거하는 친족까지 다양한 대상군을 포함하는데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여성과 남성, 청소년, 아동과 노인 등 모든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모든 종류의 언어적, 신체적, 성적 폭언과 폭행을 포함한다. 

가정 폭력은 구성원의 사회적응력을 낮추고, 인권을 위협한다. 가정 폭력에 대한 처벌법이 1998년부터 시행되었으나 여전히 그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부분이 많고 재발이 무척 빈번하다.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는 가정 폭력의 심각성과 손실에 대한 사회문화적 인식과 인지력의 부족이다. 가정 폭력을 범죄가 아닌 가정 내의 불화나 갈등 정도로 축소시키려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과 선입관이 아직도 넓게 존재한다. 무척 부끄러운 일이다.

두 번째는 신체적인 폭력만을 문제 삼고 정서적인 학대와 경제적인 위협, 성적인 폭력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통찰이 부족한 점이다.

세 번째는 가해자들에 대한 교정 및 대처, 처벌이 너무나도 미흡하다는 점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경찰에 신고했건만, 기껏 와서 한다는 소리가 ‘부부간의 일은 개입하기가 좀 곤란합니다. 알아서 잘 타이르고 해결하세요.’라는 식이면 누가 용기를 내겠는가. 재발을 묵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진_픽사베이

 

2016년 통계로 전체 인구의 12.1%가 부부폭력을 경험했다. 이를 정서적 폭력과 간섭, 통제로까지 확장할 경우 29.7%까지 늘어났다. 2010년부터 조금씩 전체 가정 폭력의 유병률이 떨어지는 추세이나, 지난 1년간 한국인 10명 중 4명 이상이 1가지 이상의 가정 폭력을 경험하였다는 결과는 무척 부끄럽고 걱정스럽다.

가정 폭력 실태에서 전체 피해자 중 66.6%가 ‘그냥 참는다.’, ‘묵인한다.’ 등의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한 경우는 고작 1.0%였다. 믿기 어려운 수치이다. 집안의 일을 외부로 알리기 부끄러웠을 수도 있고, 재발이 두려워 차마 어떤 행동을 취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는 학습된 무기력이다. 그나마 도움을 요청한 경우에서도 경찰이나 여성 긴급전화 등의 사법적, 공적 서비스에 연락하여 적극적인 도움을 구한 경우는 2.9%에 불과하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신고해도, 도움을 청해도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대처와 구호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피해자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 폭력의 피해자들을 위한 보호시설은 전국에 66개에 불과하다. 가정 폭력 상담소는 207개, 성폭력 통합상담소는 25개뿐인 실정이며 그나마 대부분이 수도권에 몰려있다. 가정 폭력의 피해자가 여성일 경우 그들을 위한 대피처는 무척 제한적이다. 집은 물론이고 친정도 때로는 그다지 안전하지 못한 공간일 때가 많다. 보호시설과 상담소의 양적인 확장은 물론 치료 보호 범위의 확대도 필수적이다. 피해자와 동반 아동을 치유하고 피해 여성과 그 가족들이 생활할 수 있는 주거공간의 제공도 필요하다.

 

특히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예방과 재발 방지 부분에서 해외와 국내의 대처법은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인다. 미국의 경우 가정 폭력의 범위를 스토킹까지 확장해 적극적인 의식 교정에 나서고 있다. 미혼이지만 동거인이나 애인, 여자 친구, 남자 친구에 대한 폭력도 넓은 의미에서 가정 폭력으로 포함하고 있다. 또한, WHO에서는 신체적, 정서적, 성적 폭력과 함께 상대방을 통제하고 조종하려는 행위도 넓은 의미에서 가정 폭력으로 포함하고 있는데 이러한 의미적 접근이 중요한 이유는 가정 폭력의 초기와 가정 폭력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고위험군 단계에서부터 적극적인 예방이 무척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사진_픽사베이

 

미국의 가정폭력 대처를 위한 근간을 이루는 덜루스 모델(Duluth model)이란 것이 있다. 미국 미네소타주 덜루스 지역에서 가정 폭력 사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지역사회와 법률, 의료, 사회 서비스 간의 강력한 관계망 구축체계로 가정 폭력 가해자의 재범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성공 사례이다. 사법기관과 민간기관의 원활한 연계로 가정 폭력 가해자에 대한 의무적 체포 조항을 시행하였고 이는 우리나라도 일부 참고하여 개정된 바가 있었다.

미국은 가해자에 대한 의무체포(mandatory arrest)제도, 적극적인 체포(pro-arrest)제도, 체포 우선주의(preferred-arrest)를 법률로 규정하고 있으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은 현장을 면밀히 조사한 후 반드시 가정 폭력 위험평가서(Domestic Violence Risk Assesment Form)를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제도적 세심함과 철저함이 재발률을 낮추는 것이다. 또한, 영국에는 가정폭력 개인상담사(Independent Domestic Violence Advisors)제도가 있어 피해자와 자녀들을 안전을 즉각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아직도 가정 폭력을 개인이나 가정의 문제로 축소하고 해결을 미뤄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적극적인 제도적 개선과 인식의 변화만이 이를 바꿀 수 있다. 가정 폭력의 피해자는 여성이나 개인이 아니라 대한민국 그 자체이다.

 

박종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연세봄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신촌세브란스병원 전공의
전) 서울대병원 본원 임상강사, 삼성전자 부속의원 정신과 전문의
현) 신촌 세브란스병원 정신과 외래교수, 연세대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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