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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과 이별한 당신에게 조심스레 건네는 위로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19.01.12 02:30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겠습니다
내 기도가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은 당신의 기도로
나는 나의 기도로
서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살아서 다시는 서로의 빈자리를 확인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서로의 부재가 위안이 되는 삶이길 바랍니다

(류근, 축시 祝詩 中)

 

요즘은 유치원 다니는 조카들도 다 이성친구가 있다고 한다. 우리 어릴 적엔 펜팔이 유행했었는데, 요즘 초등학생들은 어떻게 연애를 할까? 언제부터가 ‘오늘부터 1일’일까? 교복을 입고 손잡고 웃으며 걷는 모습도 낯설지 않고 보기에 흐뭇하다. 그렇지만 어린 만남 모두가 사랑으로 기억되진 않는다. 사람들이 ‘첫사랑’이라고 기억하는 이는 보통 10대 후반, 20대 초 중반 즈음에 만났던, 그렇게도 애틋한 마음으로 서로를 아꼈던 그다.

 

정신 분석가 에릭 에릭슨은 인간의 삶이 8단계의 심리 사회적 발달 단계를 거친다고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생애 주기별로 완수해야 하는 과제들이 있으며, 해당 단계를 잘 거치면 다음 단계의 과제로 나아간다. 하지만 단계 별로 주어진 과제를 잘 완수하지 못할 경우 이에 고착되고 해당 단계와 연관된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론에 따르면 사춘기 이전의 아동은 영유아기, 유년기 동안 근원적인 신뢰감, 자율성, 주도성, 근면성 등을 획득한다. 이윽고 찾아오는 청소년기는 정체성 확립의 시기다. 거친 자아 성찰을 통해 내가 누구이며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리는 시기이다.
 

사진_픽사베이


삶이란 무엇일까, 세상은 어째서 이 모양일까, 사춘기에 거대한 담론으로 삶을 고민하는 것(그렇다, 중2병이다)은 멋진 일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 삶의 의미, 관계 속에서의 내 모습을 인식하며 정체성(identity)을 다듬는다. 정체성을 온전히 확립한 이가 성인(adult)이다. 즉 성인이 되는 과정은 독립된 자신이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가족이라는 틀은 태어났을 때부터 선택 없이 주어진다. 20대는 그 틀을 처음 벗어나는 시기다. 가족 같은 직장은 존재하기 어렵다. 사회는 가족과는 달리, 무작정 괜찮다고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기성세대는 불안을 가능성으로 포장하고, (자신도 힘들어 보았다는 이유로) 청춘은 본디 흔들리는 것이라 쉽게 말한다.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려면 일정 수준의 단계를 넘어서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쉼 없이 마음을 압박한다. 성인이 되었으나 성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녹록지 않다.

20대~30대 중반의 초기 성인기는 에릭슨이 제시한 삶의 8단계 중 6번째 단계로, '친밀감 대 고립감(intimacy vs isolation)'의 시기다. 20여 년 만에 독립한 인간은 비로소 깨닫는다. 삶은 홀로 가기엔 지나치게 고독하다는 것을. 사랑이어도 좋고, 우정이어도 좋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은 이들이 만나, 남은 삶의 고독을 위로할 동반자가 된다. 서로의 외로움을 다독여 줄 이들이 만나 유대감을 형성하는 시기가 초기 성인기다.

 

혼자가 당연한 듯 묵묵히 걷는 삶의 여정에서 나와 같이 헤매고 있는 누군가를 본다. 마치 그래야 할 것처럼 그에게 끌린다. 서로 같은 아픔을 이해하고 위로한다. 사춘기의 설렘도 아름답지만, 흔들리는 그를 바라보는 마음은 더욱 깊고 절실하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처음으로 기억될 사랑이 시작된다.

이는 헤어짐의 경험이 없이 맞는 유일한 사랑이다. 그래서 첫사랑을 하는 이의 마음에 이별은 없다. 식상하게도 서로가 지금처럼만 영원할 것이라 생각한다. 흔한 문제는 시간이 흐른다는 것, 그리고 그를 너무 이른 삶의 여정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그렇다.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간들을 부단한 노력으로 채운다. 삶은 변수를 답으로 채워가는 과정이다. 성적, 공모전, 여행, 구직, 취미, 사람. 경험들이 답이 되어 나를 설명하는 빈칸들이 하나둘씩 메워지고 물음표가 마침표로 바뀌어 간다. 갈 길은 멀지만 삶이 나아갈 방향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점차 깨닫게 되는 그의 방향과 나의 방향이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함께 손을 잡고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방향이다. 다른 이정표 앞에서 연인은 멈춰 선다. 웃으며 서로를 다독이기도 하고, 설득도 한다. 크게 다투거나 눈물짓기도 한다. 등을 돌린 채 한참을 말이 없는 그와 나는 조금씩 깨닫는다.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다. 서로는 서로를 여전히 사랑한다. 그리고 더 이상 함께 갈 수는 없다.
 

사진_픽사베이


행복은 유화다. 하루에 하루만큼의 색채가 덧칠된다. 처음 구상한 것처럼만 그려갈 수는 없다. 인생을 그리기 시작할 때 만난 우리. 서로를 격려하고 또 자신의 작업에 심취한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바라본 그의 그림이 너무나도 낯설다. 결별할 때다.

어린 시절의 연인과 오랜 만남 끝에 결실을 맺어 평생을 약속한 이들에게 우리는 많은 찬사를 보낸다.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이겠으나,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첫사랑은 다양한 모습으로 시작하여 비슷한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도둑맞은 가난’ 이란 말을 인터넷에서 접했다. 가난으로 힘든 이들에게 ‘우리 집도 만만치 않았어.’라며 마치 그 이의 아픔도 슬픔도 다 아는 것처럼 말할 때 그들이 느끼는 상실감을 표현한 단어다. 깊이 공감했고 이후로 글을 쓸 때마다 이 말을 한 번 더 되새긴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도둑맞은 이별’의 느낌을 주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의 첫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특별했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특별한 사랑을 했고, 또다시없을 슬픔으로 이별을 고했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 모두는 최선을 다했다. 나아갈 방향이 다르기에 손을 놓을 놓아야만 다음을 살아갈 수 있을 뿐이었다.

 

상처로 끝맺은 사랑도 아름답다. 그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이별은 사랑을 앗아가는 대신 내가 누구인지, 내게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떠난 그를 기억하되 그리워하지 않을 때쯤, 남은 삶을 함께 할 인연이 거짓말처럼 다가올 것이다.

비록 아픔으로 남았지만 첫사랑의 기억으로 우리는 깨닫게 된다. 삶이란 마냥 고독하고 외로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픔으로 끝나지 않을 사랑을 만난 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별을 딛고 섰기 때문에 비로소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는 것을.

 

내가 당신의 손을 놓아준 힘만큼
당신도 누군가의 손을 가장 큰 힘으로 잡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노래는 이제 끝났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류근, 축시 祝詩 中)

 

추신.

그리고,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나희덕, 푸른 밤 中)

 

지금 당신의 선명한 이별의 아픔이, 생의 동반자가 될 그를 향하는 무수한 길 중 하나이기를 기원한다.

 

* 에릭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 단계

그림_네이버지식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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