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자존감이 시대의 화두다. 예능 프로의 패널들이 언급하고 무심코 튼 라디오에서도 흘러나온다. 이를 제목으로 삼은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자존감에 대해 고민한다는 반증일까.

자존감(self- esteem)의 사전적 정의는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다. 자존감과 같은 듯 묘하게 다른 말이 자존심이다. 전자가 홀로 충만한 느낌이라면 자존심은 어딘지 모르게 경쟁적인 인상이다.

같은 사전을 찾아보면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라 되어 있다. 뜻만 보면 대동소이해 보인다.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는 ‘남에게’라는 단어에서 온다. 타인의 기준을 넘어서는 지점에 도달하여 ‘비교를 통해’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 자존심(pride)이다.
 

사진_픽사베이


자신의 가치관을 확립하고 삶의 방향을 세우기 전부터 우리는 사회적 요구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스스로만의 행복을 정의 내리기도 전에 행복이라 제시된 길, 이를 가져다줄 것이라 주입된 길을 걸으며 고통을 감내한다. 부모의 바람, 대학 커트라인을 따라 우수한 성적을 추구한다. 사회의 통념에 따라 돈을 벌며 명품 의류와 외제차를 소망한다. 이에 라캉은 ‘현대인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 통찰했다.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나도 바라는 게 무엇이 문제일까. 좋은 집은 누가 살아도 대개 좋다. 본질적인 문제는 만족의 기준이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자존감과 달리 자존심은 비교 우위를 통해서만 충족된다.

집 평수를 결정할 때 가족의 경제 사정, 생활상과 적합한 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통념이다. 신혼집을 원룸으로 하려면 왠지 모르게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17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벤x 판매량은 세계 5위이며, 최고가 모델인 S 클래스는 본국인 독일보다도 많이 팔린다. 인구와 경제규모 대비가 아닌 순수 판매량 기준이다. 대형차 그랜저의 판매량이 소나타를 앞지른 지도 꽤 되었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의 결과는 일시적인 안도와 만성적인 공허의 반복이다. 집값이 올라 회사 동기 중 최고의 부자가 되어도 회장님보다는 가난하다. 우리 회사 회장님보다는 이재용이, 그보다는 빌게이츠가 더 부자다. 외부의 가치는 상대적이기에 온전한 만족은 어렵다. 마음은 갈구와 체념 그 사이 어디쯤을 부유한다.

공허감을 채우려, 사람들은 내가 이미 성취한 욕망을 다른 이들도 욕망하기를 바란다. 취직은 해야지, 집은 있어야지, 연봉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나보다는 아직 덜 갖춘 이들을 보며 자존감의 빈자리에 자존심을 채운다. 일시적인 우월감 후에 더 큰 허전함이 밀려온다. 어느 기준에라도 도달한다면 다행이다. 갖추지 못한 이들은 그 이유만으로 박탈감을 느껴야 한다. 악순환이다.

매스컴은 한술 더 떠 상식을 가장한 판타지를 판다. 살면서 몇 번 마주치기도 힘든 소위 ‘엄친아’들이 마치 평균적인 삶의 군상인 것처럼 묘사된다. 연예인 같은 외모와 대단한 재력을 갖춘 전문직 젊은이들이 텔레비전에 등장하여 미래, 사랑에 대해 나와 같은 고민을 한다. 은연중에 ‘이 정도는 되어야’ 열심히 사는 거다, 한 사람 몫은 하는 거다, 라는 메시지가 주입된다. 현실에서는 찾기 힘든 환상이 사고 팔리며 행복으로 ‘인정받는’ 기준마저 높아져 간다.
 

사진_픽사베이


이상향과 현실의 괴리로 힘든 이들이 늘수록 자존감이 주목받는 것은 당연하다. 자존감은 온전히 내 것이며, 외부의 시선과는 무관하게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지금부터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기로 해보자. 논리적으로 합당하고 거창한 말인데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걸 몰라서 고민할까?’라는 반문이 든다. 식상하다. 스스로를 무작정 인정하자니 말은 좋은데 그럴 만한 구석이 있으면 더 좋을 것 아니냐는 반감도 든다. 여우가 먹지 못하는 포도를 시다고 폄하하는 것처럼, 가지지 못한 것들을 애써 외면하는 일종의 정신승리 같기도 하다.

그래서 조금은 돌아서 자존감에 다가가 보려 한다. ‘자기 이해’를 통해.

 

잠깐이라도 마음에서 타인의 시선을 거두는 것은 어렵다. 정말 어렵다. 하지만 조금만, 5분만이라도 다른 생각을 멈추고 떠올려 보자. 좋아하는 음식, 멋졌던 시간, 잊혀지지 않는 추억. 마지막으로 감사했던 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떠오른 것이 있다면, 조금 더 세세히. 일주일만의 치팅데이에 시킨 양념순살치킨. 연습을 해도 해도 허접하지만 그럭저럭 마친 동아리 공연. 연습 때만 넣다가 처음 게임에서 성공한 3점 슛. 구직 스터디 사람들과 마시는 맥주 한 잔. 상사가 휴가라 마음 놓고 칼퇴하는 길에 만난 노을. 20년 지기들과 펜션에서 구운 바비큐. 타이밍 좋게 도착하는 시내버스. 택배. 일주일을 그리면 만날 수 있는 당신.

그것들이 일상을 노크할 때 잠시나마 설렌다. 막연하지만 느껴진다. 행복이다. 비로소 마음을 옥죄던 세상의 기준들에서 그 순간만큼은 해방된다. 마음을 떠나지 않는 취업 걱정, 직장의 시름, 신경 쓰이는 사람들, 그 순간만은 아주 잠깐일지라도 괜찮다. 어쨌든 이렇게 나는 살아있음을 느끼고,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사전적 정의, 학문적인 고찰을 넘어 자존감이란 단어 자체를 살펴보면 ‘스스로 온전히 존재하는 느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남몰래 좋아하는 그를 떠올릴 때, 처음으로 만들어 본 떡볶이가 맛있을 때, 아껴 쓴 월차로 떠난 곳의 야경에 눈물이 날 때, 그 느낌만큼은 어느 다른 누구의 감각을 따르는 것이 아닌, 오롯이 나만이 느끼는 감동이다.

다른 무엇보다 값져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에 소중한 것들이 있다. 삶 속에서 그것들을 발견하고 감동할 때, 우리도 자존한다. 이러한 작은 기쁨으로 삶의 시선을 돌릴지는 온전히 우리의 선택이며 권리이다. 이 자유에 감사하는 것이 자존감은 아닐까.

 

얼마나 좋은 차를 타고 비싼 집에 사는지는 세상의 기준에 나를 얼마나 잘 맞추었는지를 알려 준다. 언제 기쁘고 슬프며, 어떤 이를 사랑하는지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 준다.

뒤쳐지는 것 같아 걱정되고 자신을 믿지 못해 고민이라면 먼저 스스로를 이해해 주면 어떨까. 마음을 젖게 하는 한 곡의 음악, 잊지 못할 영화의 한 장면, 세월이 지나도 그리운 그 순간. 세상 누구와도 같지 않을 나만의 행복으로 인도할 소중한 삶의 이정표들이다. 기준이 아닌 ‘취향’으로 시작하는 자존감이다.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라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만큼은 스스로 이해하고 존중하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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