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행복을 연습한다, 어쩐지 인위적이다. 거부감마저 느껴진다. 왠지 행복이란, 어떤 조건이 맞으면 저절로 주어지는 느낌이다.

'이번 시험에 합격하면 이제 행복 시작이다.' '짝사랑하는 그와 이어진다면 행복할 거야.' '행복은 결국 돈이다.'

이러한 가정들이 틀렸다거나 현실과 행복은 별개다, 전적으로 마음에 달렸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해내야 할 때, 버터내야 할 때도 있다. 도무지 긍정하기 힘든 순간들도 많다.

다만 이러한 삶의 고비들을 넘다 보면 잊어버리기 쉬운, 항상 곁에 있는 것들을 되짚어 보고 싶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아이들은 참 즐겁다. 별 이유 없이 하나가 뛰쳐나가면 다른 아이는 그것을 따라가느라 기쁘다.

우리가 5분이면 가는 길을 아이 홀로 가면 한 시간이 걸린다. 아이의 눈에는 들풀이 보인다. 구름도 보이고, 나무도 보인다. 매일 가는 그 길이 매일 다르다. 산책하는 멍멍이 한 마리라도 있을라치면 눈을 떼지 못한다.

누구나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를 본 것으로 기뻤던 적이 있다.
 

사진_픽셀


하늘은 아름답다. 이를 '인식하면' 행복하다. 하지만 일상의 많은 아름다움들은 '인식되지 못하고' 자동적으로 흘러간다. 그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무던한 소중함들 대신, 세상을 따라잡는 생각들이 머리를 메운다. 신경 쓰이는 인간관계, 얼마 남지 않은 시험, 마무리해야 하는 업무가 머릿속에 내내 맴돈다. 이루고 싶은 성취와, 그에 따르는 걱정이 가득하여 작은 감동이 끼어들 틈이 없다.

걱정의 속성 중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지속적인 불안 이면에, 불안해하는 것 자체가 좋은 결과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마술적 사고가 숨겨져 있다고 한다. 편안한 마음 자체가 불안하여 걱정을 만든다.

'정말 중요한 시기인데, 이렇게 넋 놓고 있어도 될까? 마음 편히 있을 자격이 있을까?'

 

우스갯소리로 '걱정의 60%는 일어나지 않을 일, 30%는 잘 해결될 일, 10%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한다.

주요한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최선의 결과를 위해 꼭 필요하다. 하지만 과도한 초조함은 역으로 주의를 흩트리고 스스로를 지치게 한다. 잘 해내기 위한 노력이, 잘 해낼 수 있을까 란 걱정으로 번져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할 때도 있다.

이러한 걱정의 바탕에는 성취와 행복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마음이 자리한다. 어느 지점에 도달한 쾌감만이 행복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행복을 '갈구하는' 시간으로 만든다.

갈구의 본질은 불만족, 불충분이다. 현재가 온전히 행복한 상태가 아니라, '아직 행복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대학 선배가 고교 시절 자신의 공부 방법을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선배는 일요일은 드럼을 치는 데 보냈고, 대신 하루를 온전히 드럼에 몰두하기 위해 평일에는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고 했다.

당시의 나는 충분한 휴식이 더욱 효율적이구나 (선배는 성적이 좋았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성적을 위한 효용가치로 환산하여 계산하던 내가 안타깝다. 선배는 알고 있던 살아가는 맛을, 나는 미처 몰랐다.

 

성과가 주는 성취감은 무한정 지속되지 않는다. 실패의 아픔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생의 시간은, 찰나의 성공과 실패 사이를 이루는 '그저 삶'으로 채워진다. 따라서 그 평범한 일상의 만족이 행복한 삶의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

명예, 권력, 부 등을 추구하는 욕구나, 초조, 불안 등의 감정은 직관적이다. 이성, 의식에 앞서 머릿속에 자리 잡는다.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걱정하거나, 어느새 욕망하고 있는 자신을 흔히 발견한다.

걱정하는 일이 모두 마음과 같이 해결되고 욕망이 무한정 달성된다면, 어쩌면 인간은 고뇌 없이 평안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천천히 느끼고 받아들이는 소소한 삶의 아름다움은 욕망, 부정적인 감정들과는 다소 성격이 다르다. 그것들은 갈망을 일으키지도 않고, 각고의 노력 끝에 쟁취해야 하는 것들도 아니다.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듯, 작은 소중함들도 삶 한켠에 그저 존재하고 있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 멈춰 서서, 고마움을 표하는 귀여운 아이의 미소 띤 감사 인사를 받았다. 작은 해프닝이고 별 일은 아니다. 그런데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배꼽 손을 한 그 모습을 떠올리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그때 느낀 감정은, 흔히 행복이라 말하는 느낌과 많이 닿아 있었다.
 

사진_픽셀


마음의 주의를 빼앗는 많은 고민들, 상념들이 마음을 휘젓다 보면 작은 아름다움들은 잊히기 마련이다. 출근해서 해결할 일 생각에 빠져 있었다면, 업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이의 모습 같은 건 이내 스쳐 지나가 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아주 사소한 연습이 필요하다. 팍팍한 삶 속에서도 피어나는 들꽃들을 놓치지 않는 연습. 이를테면,

월요일 출근길이라도 하늘을 바라보기, 지하철에서 매일 바라보는 한강이지만 갓 상경했을 때의 설렘을 안고 물결에 부서지는 햇살을 감상하기, 첫눈이 오면 잠시라도 창밖을 내다보고, 비로소 찾아온 햇살에 니트를 꺼낼 때는 오래 묵은 나프탈렌 냄새를 느껴보기, 비가 내리면 평소 지나치기만 했던 녹두전 집을 들러보기, 항상 곁에 있는 그의 눈을 문득 곰곰이 들여다보기, 같은.

 

삶을 어루만지는 것은 무거운 상패,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이들의 찬사보다는, 지친 발걸음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을 빼꼼히 내다보는 복실이의 표정 같은 것들이다.

강아지 한 마리의 귀여움에도 다시 기쁠 수 있다면, 삶에 얽매이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은 현재의 소소함에 집중하는 것이다. 본능은 초조한 욕망으로 마음을 유혹하고 이끈다. 무작정 이에 온 신경을 이끌리기보다, 찬찬히 지금을 음미하는 '연습'을 해 보면 어떨까. 별 감흥이 없던 일도 행복으로, 조그만 기쁨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부족한 실력으로 피아노를 연습하다 보면 속이 답답할 때가 많지만, 문득 깨닫는다. 곡을 멋지게 완성해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삐뚤빼뚤 연주를 하고 이를 들을 수 있기에 즐겁다는 것을.

행복을 연습하다 보면 문득 깨닫는다. 지금 벅찬 것은 어딘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습관처럼 행복을 연습하다 보면 습관처럼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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