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강남 푸른 정신과 원장]

 

최소의 비용과 최대의 대가, 가성비

가성비(가격 대 성능비)라는 말이 있다. 대개 생활용품이나 전자제품을 구매할 때, 가격에 비해 쓰기 적당하고 나쁘지 않은 성능을 찾기 마련이다. 가격은 비싸지만 성능이 한참 모자라는 것을 찾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연하게도. 되도록이면 저렴한 가격에 성능은 평균 정도, 혹은 그 이상의 성능을 기대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가격 곡선과 성능 곡선이 절묘하게 만나는 그 지점에서 가성비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가성비라는 말은 일견 편리해 보인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을 지불하고, 또 지불한 데 대해 적절한 대가를 얻게 되길 내심 바란다. 아니, 적절한 수준이라기보다, 실은 최고의 대가를 얻길 원한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맞겠다. 그러니 가성비는 인간의 합리성(으로 포장하는 탐욕)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더 깊게 들어가 보면 최고의 가성비는 최소한의 비용에 최대의 대가를 얻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대가를 얻기 위한 시간, 노력, 비용은 가능하면 아낄 수 있으면 좋다. 분모는 한없이 작아지고, 분자가 한없이 커지는 것이 가장 이득이니까. 

우리는 삶에서 늘 효율을 찾는다. 점심시간에 먹을 음식을 정할 때도, 가격에 비해 ‘더 푸짐하고 맛있는’, 기왕이면 ’더 깔끔하고 친절한’ 곳에 가려한다. 끼니 때가 되면 줄을 서서 먹을 정도로 사람이 몰리는 곳은, 다름 아닌 가격에 비해 푸짐하고 더 고급스러운, 그러니까 가성비가 뛰어난 음식점일 테다. 근처에 위치한 주유소보다 조금 떨어진 곳의 기름값이 더 저렴하다면, 어느 곳이 ‘가성비’가 더 나을 것인가 고민하기도 한다. 비단 경제활동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투입한 비용 대비 얼마나 많은 이익을 얻을까에 골몰하는 것이다.
 

사진_픽셀


관계에도 '가성비'가 있을까?

그리고, 인간관계에서도 가성비의 잣대는 비껴갈 수는 없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 태어난 곳에서 오랫동안 사는 것을 당연시했던 과거와 분명 다르지 않은가? 우리의 조상들은 고향에서 태어나 농사 같은 가업을 이어받고, 이웃 동네에 사는 아무개와 연을 맺어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가거나, 직장을 옮기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자연히 평생을 고인 물처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나 가족, 친척들과 어울리며 평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 다른 시대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학 진학부터 기를 쓰고 ‘인 서울’을 바라고, 사회와 문화의 중심지인 수도권은 날로 확장되어간다. 자의든 타의든 자신이 태어나 살아가던 둥지에서,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언젠가는 벗어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사회의 변화가 인간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삶의 물리적 영역이 넓어지면서, 우리는 다양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관계의 절대적 수가 늘어났다는 말이다. 과거처럼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는 이들에게 정겹게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묻고, 그러다 보니 은밀한 속사정도 말하고, 결국 옆집의 수저 개수마저도 알게 되는 일이 이제는 없다. 또 다른 변화는, 관계의 절대수가 많아지게 되면서 관계에서 효율을 따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과의 관계가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인지, 도움이 된다면 얼마만큼 노력을 투입해야 이 사람과 오랫동안 비슷한 결의 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인지 자신도 모르게 계산적이 된다. 내가 이 사람에게 시간, 노력 등 유무형의 비용을 투자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지에 대한 고민도 생기기 시작한다. 관계에서도 ‘가성비’를 따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물리적 거리가 중요한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좁은 종류의 관계에 갇혀 사는 행태도 사라지고 있다.

 

눈 앞의 소중한 관계에 집중하자

하지만, 관계에도 가성비의 잣대를 들이는 것이 괜찮을지에 관한 고민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인물과의 관계를, 딱 필요한 만큼만 ‘선택’하려 한다. 적당한 선에서 관계를 유지하면서, 얻을 수 있는 유무형의 것들을 재보기도 한다. 그러나 관계를 재고, 노력의 투입과 이득의 산출 곡선을 머리에 그리는 동안 관계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기 마련이다. 상대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요소만 취하려는 생각은, 눈 앞에 있는 이를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들 뿐이다. 결국 관계란 곶감처럼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빼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가성비를 따지다간 허울 좋은 관계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또, 관계의 가성비를 따지며 관계를 ‘현명하게’ 선택한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관계를 바라보는 감각이라는 것은 무의식에 자리하고 있어 쉽게 변하지도, 또 기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자신이 이전에 해 왔던 관계의 결이 쉽게 변하지는 않는다. 

사소한 물건을 구매할 때도 우리는 웹서핑을 하며 수많은 후기와 가격대를 비교하거나, 직접 발품을 팔아가며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가격에 비해 꽤 괜찮은 것을 구하는 일이 그리 녹록지는 않다. 그리고, 비싼 제품일수록 이런 경향이 더 많아진다. 그렇다면 관계의 가격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관계란 것은 필요한 메뉴만 주문해서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을 두고 약불에 뭉근하게 오랜 시간 우려내야 하는 곰탕에 비유할 수 있겠다. 관계의 효율, 이득을 따지기 전에 내 눈앞에 있는 이와의 관계에 온전히 집중하자. 바쁜 삶에 치이더라도, 내 마음을 온전히 우려낼 수 있는 관계가 있다면 그 상대방은 당신에게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이다. 가성비를 따지기보다 관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눈 앞의 관계를 소중히 하는 마음이 우리 삶을 더 따스하고 풍요롭게 만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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