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강남 푸른 정신과 원장]

 

삶을 짓누르는 과한 걱정,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얼마 남지 않은 각종 세금 고지서, 내일까지 해결해야 하는 밀린 업무들, 엊그제 다투고 나서 토라진 연인을 달래는 일, 몸이 안 좋다고 했던 부모님은 좀 나아지셨는지에 대한 염려 등 우리 인간의 삶의 여정에는 온갖 걱정이 덕지덕지 묻어 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염려해야 할 일들이 참 많아요. 

염려는 염려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염려와 걱정이 과해지면 각종 신체적 긴장, 통증이 유발되거나 가슴 두근거림, 가슴에 무엇인가 얹힌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지는 신체적 불편감이 나타나기도 하지요. 어떤 경우엔 과한 염려가 마음의 병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정신의학의 진단 체계인 DSM-5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의 과한 걱정과 염려, 그리고 동반되는 신체 증상들이 계속될 경우 이를 범불안장애(Generalized anxiety disorder)라는 질환으로 규정합니다. 과한 걱정이 삶을 짓누른다면, 치료해야 할 병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지요. 

인간의 삶에서 염려와 걱정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 존재입니다. 아니, 어쩌면 일상에서 늘 만나게 되는 공기와 같은 존재일지도 몰라요. 그러니 우리는 운 좋게 걱정거리가 사라져 버릴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염려와 걱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루어야 할지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마주치는 걱정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사진_픽사베이


걱정, 피하기보다 받아들이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염려는 사실 인간의 본능이지요. 갓 태어난 신생아는 환경이 조금만 바뀌어도 울음으로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이처럼 불안이라는 감정은 태초부터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이미 새겨져 있습니다. 떨치려 해도 쉽게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염려와 걱정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걱정하던 일이 깨끗하게 해결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삶은 우리 생각보다 녹록지 않습니다. 염려하던 상황이 실제로 닥치거나, 혹은 더 나쁜 상황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은 이러한 걱정과 염려의 원흉을 없애려 부단히 애쓰지만, 사실 내 마음처럼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애초부터 걱정하지도 않았을 테지요. 오히려 걱정거리를 피하거나 제거하려는 노력은 더 큰 불편함을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걱정의 특징은 하면 할수록 그 부피가 커져 나를 짓누르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맞닥뜨린 염려를 '일차성 염려'라 한다면, 우리가 염려를 거듭할수록 또 다른 '이차성 염려'를 낳는 경우도 많아요. 예를 들어, 업무에서 사소한 실수를 한 김대리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어떡하지'라는 염려에서, 염려를 거듭할수록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나는 회사에서 평판이 엉망이 될 거야.'라는 생각으로, 다시 '해결하지 못해 평판이 나빠지면, 결국 그만두게 되고, 나는 잉여 백수가 되어서 지내야 할 거야.'와 같은 더 크고 왜곡된 생각으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지요. 마음의 고통은 더 심해지기만 합니다. 인간의 사고 과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인지 왜곡 중 재앙화(catastrophizing)가 바로 이 것인데, 작은 걱정이 꼬리를 물고 점차 그 정도를 더해간다는 말입니다. 과도한 염려에서 비롯된 재앙화는 삶에 많은 불편함을 낳게 됩니다. 걱정과 염려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자신의 생각에 재앙화가 숨어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그럴 수 있겠구나'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우리 인생은 불확실성의 연속입니다. 예측 불가능한 '그 무엇'들이 얽혀들면서 복잡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것,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인류적 삶의 방향이기도 합니다. 불확실한 것에 대해 염려와 걱정을 하며 에너지를 쏟는 것보다 애초에 불확실한 것들이 일어날 수 있음을, 그리고 그 문제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가 만성적인 걱정과 염려의 영향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일상의 사소한 염려는 불편한 손님맞이하듯

염려를 받아들이기 위해 은유(metaphor)의 사용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편한 손님을 맞이한다 생각해 볼까요?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는 손님이 썩 편하지 않다 해서 설득하거나 윽박질러 쫓아내려 한다면, 우리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을 것입니다. 집을 찾아온 손님이 우리 마음처럼 쉽게 나가주지 않을 수도 있고요. 또, 그 손님이 언제 우리 집에서 나갈 것인지 노심초사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하는 것도 참 피곤한 일이겠지요.

일상의 사소한 염려에 대해 '손님맞이'를 해 봅시다. 어차피 맞아들여야 할 사람이라면, 그저 큰 사고만 치지 않도록 적당한 선에서 지켜보면 됩니다. 말 그대로 잠깐 왔다가는 손님일 뿐인 거지요. 언제까지고 머무르지는 않을 겁니다. 멀찍이 떨어져 가끔만 눈길을 주다 보면, 때가 되어 집을 나가는 손님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스쳐간 많은 고민들 중, 오랫동안 우리 곁에 머무르며 괴롭히는 고민은 손에 꼽힐 정도입니다. 또, 발버둥 친다고 금세 사라지는 고민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가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며, 우리를 스쳐가는 고민들을 가만히 관찰하게 된다면 많은 걱정거리가 잠시 왔다 가는 '불편한 손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몰라요.

 

걱정에 빠진 자신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 메타인지 (Metacognition)

염려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멀리서 바라볼 수(distancing) 있어야 합니다. 염려에 빠진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다면 지금의 걱정거리가 그리 압도적이지 않음을, 그리고 평소처럼 흘러가 버릴 것임을 깨닫게 되니까요. 염려에 빠진 자신의 복잡한 머릿속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메타인지(metacognition)이라 합니다.

눈앞의 걱정이 피할 수 없이 압도적이라 여겨진다면, 도저히 걱정의 산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느낌이 든다면 자신을 둘러싼 경관을 상상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여행 이야기가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카메라가 갑자기 출연자의 머리 위로 훌쩍 넘어가며, 주변의 멋진 자연경관을 비칩니다. 금세 출연자는 까마득한 점이 되어버리지요. 우리는 잠시나마 복잡하고 답답한 세상 이야기들을 잊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몰두합니다. 마치 드론 뷰(drone view)처럼, 영원히 나를 괴롭힐 것만 같은 고통도 위로 점점 올라가 내가 사는 이 공간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 우리의 전체 삶에 묻어 있는 작은 티끌일 뿐인 것이지요.

걱정을 무작정 작게 축소해 생각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걱정거리를 조금 더 과장되게 받아들여 많은 위기에서 살아남은 '겁쟁이 원시인'의 후손들입니다. 눈 앞의 걱정거리를 조금은 현실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삶을 짓누르는 걱정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힘을 얻게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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