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본 내용은 실제 상담 내용을 바탕으로 가공된 내용입니다. 내담자의 동의를 얻어 작성되었습니다. 

 

내담자: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는 아버지가 너무 미워서 상담을 신청하게 되었어요. 저희 부모님은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이혼을 하셨어요. 저는 엄마랑 같이 살고 있고요, 아빠는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해요. 아빠가 사업을 하다 실패를 하셔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다 보니, 엄마랑 이혼을 하시게 되었어요. 지금은 어디서 열심히 일은 하시는 것 같은데, 양육비조차도 제대로 보내주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에요. 아빠인데 아빠 노릇을 전혀 못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제가 중간고사 시험 기간이었는데요. 아빠한테 전화가 왔었어요. 오랜만에 온 전화여서 기대를 했었는데 전화를 받자마자 아빠가 하시는 말씀이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 그러니 제 이름으로 된 보험을 해지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보험회사에서 전화가 올 거니까 전화가 오면 동의한다고 말하라고 하더니 전화를 바로 끊더라고요. 전화를 끊고 나니 너무 실망스럽고 화가 많이 나더라고요. 전 고3이고, 시험기간이면 한 창 예민할 땐데 기껏 전화 와서 한다는 이야기가 제 이름으로 된 보험을 해지한다는 말이나 하고. 저는 돈이 없어서 저녁도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으로 때웠는데... 이 모든 게 아빠 때문인 거 같고 너무 원망스러웠어요.

사실 아빠가 없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솔직히 아빠가 있으나 없으나 저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괜히 아빠라는 존재가 민폐만 주는 거 같아요. 아빠가 없었으면 이렇게 우리 가족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지도 않았을 거 같고. 양육비도 제대로 못 보내주면서, ‘아빠’라는 호칭으로 불릴 자격도 없는 거 같아요. 엄마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거든요. 아빠가 양육비도 제대로 보내주지 않는다고, 엄마도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어하세요. 엄마가 이렇게 힘든 것도 아빠 때문인 거 같고. 저한테 아빠라는 존재는 왜 있는 걸까요. 차라리 없는 게 제 인생에 더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제 친구들을 보면 아빠가 용돈도 충분히 주고, 원하는 게 있으면 사주고 그러는데. 그리고 고3이라고 공부하느라 힘들 테니 학교에 데리러도 와주시고. 근데 저는 그런 게 전혀 없어요. 그런 친구들이 너무 부러워요. 저는 집에 돈이 없으니까 대학도 장학금을 주는 데 아니면 가지 못할 거 같아요. 다른 친구들은 돈 걱정 없이 원하는 학교를 가면 되는데. 저는 제가 원하는 대학보다도 장학금을 주는지, 학비는 싼지 걱정부터 먼저 해야 돼요. 제가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대학을 갈 수나 있을지도 잘 모르겠어요.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화가 나고, 그냥 이 모든 게 다 아빠 때문인 거 같아요. 그냥 아빠가 죽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엄마랑 동생이랑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저한테는 아빠라는 존재 자체가 짐인 거 같아요. 저도 다른 친구들처럼 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실 동생만 해도 그래요. 저희 집안 사정에 대해 동생은 잘 모르거든요. 엄마가 저한테만 이야기를 했거든요. 동생은 아직 어리니까 저만 알고 있으라면서요. 근데 저도 그냥 이런 얘기 모르고, 다른 아이들처럼 어른들 품 속에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냥 세상 사는 게 너무 버거운 거 같아요.

사실 엄마가 제일 불쌍하죠. 엄마도 혼자 얼마나 힘드셨으면 저한테 이야기를 털어놓으셨겠어요. 이 모든 게 다 아빠 때문이에요. 진짜 왜 우리 아빠가 돼가지고. 이제 아빠고 뭐고 연락 딱 끊고 전화 와도 안 받고 모르는 척할래요. 저한테는 아빠는 없는 거예요. 그냥 죽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너무 화가 나네요. (침묵)


상담자: 이야기 초반에 아버지한테 오랜만에 전화가 왔었고 기대를 하셨다고 하셨는데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나요?

내담자: (침묵) 그러게요. 무슨 마음이었을까요. (침묵) 잘 모르겠어요. (침묵) 그냥 놀라운 마음에서 그랬던 거 같기도 해요. 너무 오랜만에 연락이 왔으니까...

상담자: 그런데 왜 실망을 했죠? 놀라운 마음은 아니었나 보네요.

내담자: (침묵) 놀라운 마음은 아니었네요. 왜 그랬을까요? (긴 침묵)
 

사진_픽사베이


상담자: 어렸을 때... 초등학교, 중학교 때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셨어요?

내담자: 어렸을 때요? (침묵) 어렸을 때는 아빠랑 친했었어요. 아빠가 저를 많이 예뻐해 주셨었거든요. 아빠가 저한테 화를 낸 적도 한 번도 없으세요. 사실 아버지가 주변 사람들한테 호인으로 많이 불리셨어요. 사람이 참 좋다고. 잘은 모르지만, 그래서 사업도 실패하셨던 거 같아요. 엄마 얘기로는 사람을 너무 믿어서 그랬다고 하시더라고요.

(침묵) 그러게요. 생각해보니까, 제가 어렸을 때는 아빠를 많이 좋아했었네요. 저는 아빠랑 노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 아빠랑 같이 놀이공원 갔던 기억도 나고요. 다 기억이 나는 건 아니지만, 어렸을 때 기억은 나쁘지 않았던 거 같아요. 아빠가 저한테 장난도 많이 치셨었고요. 좋았었어요. 그때는... 그때는 우리 가족이 행복했었던 거 같아요. 그때는 엄마랑 아빠랑도 사이가 좋았었는데... 엄마가 저한테 장난으로 질투도 하셨어요. 아빠는 너만 이뻐한다고... (침묵)

아빠가 불쌍한 사람인 거 같아요. 아빠도 열심히 하시려고 하시다가 그렇게 되신 건데... 아빠가 사업이 실패하고 나서 저희 가족한테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이 ‘미안하다’였거든요. 어떤 아빠들은 큰 잘못을 하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안 하는데... 저희 아빠는 늘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맞아요. 아빠 잘못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아빠 잘못은 아니었네요. 그런데 저는 아빠를 미워만 하고 있었네요. 저한테도 좋은 아빠가 있었었네요. 제가 아빠한테 미안하네요. 아빠를 그렇게 미워할 일은 아니었는데... (침묵)
 

상담자: 일반적으로 양극단은 맞닿아 있습니다. OOO 님께서 아빠에게 그렇게 공격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반대급부로 그만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입니다. 사실 없어도 상관없을 만큼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 공격적인 감정도 생기지가 않거든요. OOO 님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OOO 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외치는 소리를 그대로 인정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와 사랑하고 싶은 그 마음이 소외받지 않도록요.

내담자: 어렸을 때 아빠와의 좋은 기억, 감정들을 다 잊고 있었던 거 같아요. 이제는 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연습을  해볼래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진짜 내 이야기’가 뭔지 알 거 같아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부짖고 있는 제 마음을 무시하지 말고 인정하고 바라봐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내 인생인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며 힘들어하십니다. 위 상담사례를 보고 나니 ‘왜’ 내 인생인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는지 짐작이 가시나요?

내담자가 ‘아버지에 대한 공격적인 마음’을 갖고 평생 살아가면 인생이 어떻게 될까요? 아버지를 계속 미워하고 그러다 보면 점점 멀어지고. 거리가 멀어지니까 아버지를 점점 더 미워하게 되고. 이렇게 살면 정말 내 삶이 편해질까요?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계속 울부짖고 있을 텐데요? ‘아버지랑 사랑하고 싶어’라고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외치고 있는 ‘진짜 내 마음’을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알아줘야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진짜 내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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