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대한불안의학회 유상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인간은 달변으로 말할 수 있지만 대부분 허구적이라 늘 공허하다. 동물은 한정된 것만 말하지만 그것은 모두 진실되고 유용하다. 큰 허구보다 작은 진실이 값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일기에서

 

백내장으로 탁해진 눈, 윤기 없는 털이 헐겁게 가리고 있는 검버섯 핀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13살의 그 늙은 개는 잠자듯 가만히 있는가 했더니 힘겹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내가 아는 눈동자도 표정도 아니다. 우리 개들의 미용이 끝나(우리 집에는 세 마리 개가 함께 산다) 예뻐진 녀석들을 태우고 돌아오는 내내 그 노견의 모습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명(命)을 다해 무지개다리를 건넌 개를 키워 본 적이 없다. 나이 든 개를 가까이서 본 것도 기억에 없다. 우리 집 도파는 이제 6살, 개의 수명이 15년이라고 보면 앞으로 6년 정도면 노견이 된다. 처음 만나 지금까지 얼마나 순식간에 시간이 흘렀나 생각해보면 앞으로도 긴 시간이 아니다. 이거 참 고약하다.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관계를 맺는 데 가장 큰 문제점은 서로 수명이 다르다는 것이다. 
 

사진_픽셀


♦ 다르게 흐르는 시간

하긴 모든 동물은 서로 다른 시간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루살이에게는 24시간이 평생이고 척추동물 중 가장 수명이 긴 거북이 중에는 250년을 사는 놈도 있다. 개의 수명은 평균 15년, 사람 수명은 길게 잡아 90세 정도이니 대략 계산해보면 인간이 개보다 6배 정도 오래 사는 셈이다. 그래서 아무리 장수하는 개라 할지라도, 인간은 개의 노화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백내장, 당뇨, 관절염, 암 등 사람이 나이 먹어가면서 걸리는 거의 모든 질환을 키우는 개를 통해서 먼저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끝에는 죽음이 있다. 이것은 정말로 독특한 경험이다.

경험하는 사람이 어린이인지 노인인지, 건강한지, 아픈지 등에 따라 그 과정에서 느끼는 경험치가 달라진다. 아이들은 죽음이라는 어려운 개념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어른들이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받아들일 수 있는 설명을 해 줘야 한다. 종교나 동화 등을 이용해도 좋다. 외롭고 슬픈 감정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반려견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자신을 대입하게 된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성찰하고 주변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각기 다른 네 마리 노견의 죽음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다. 평생을 직장 일에만 파묻혀 살던 무뚝뚝한 가장이 나온다. 정년퇴임 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가족들은 너무 바쁘고 곁에 있는 건 별로 친하지도 않던 반려견이다. 그리고 그제야 강아지라고만 여겼던 반려견이 다리도 잘 못쓰고 눈도 잘 안 보이는 늙은 개라는 걸 알게 된다. 아버지는 곧 죽음을 맞을 반려견을 돌보며 가족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된다.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늙은 개를 도우며 ‘나도 젊어서는 산에서 날아다녔는데’라던 그의 담담한 혼잣말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사진_픽사베이


♦ 펫로스 신드롬

진료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들고 찾아온다. 가족을 떠났거나 혹은 떠나보냈거나 결혼에 실패해 혼자 살며 괴롭거나 헤어지지 못해 괴롭거나 더 많은 경우 아직까지 짝을 찾지 못하거나 가족을 만들지 못한 사람들이다. 누가 곁에 없어서 혹은 있어도 외로운 사람들이 많다. 인간은 외로움에 취약한 사회적인 동물이다. 그래서 다른 동물을 ‘반려’만의 목적으로 키울 수 있었다. 게다가 반려견은 일관되고 성실한 사랑을 행동으로 증명하는 믿을만한 대상이다. 반려견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상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반려견의 죽음이고 그로 인해 겪는 상실감이다. 

병원을 방문한 40대 여성이 있다. 반려견이 항암치료 중이지만 그리 오래갈 것 같지 않아 떠나보낼 생각을 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했다. 나는 이미 우울증을 앓고 있는 그녀가 반려견을 떠나보낸 후 병세가 심하게 악화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반려동물이 죽으면서 느끼게 되는 우울감과 상실감을 뜻하는 펫로스 신드롬은 건강한 사람도 우울증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무서운 문제다. 2012년 부산에선 반려견의 죽음을 비관한 40대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감을 경험한다. 

한 매체의 요청으로 펫로스 신드롬에 대해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인터뷰를 하던 2012년만 해도 500만 정도로 추산되던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2018년인 지금은 천만에 육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반려동물이 2000년을 전후로 급증했다고 보는데 현재 그 동물들의 나이가 지금 18살이다. 각 가정에 수명을 다했거나 다해가는 반려동물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첫 번째 반려동물이고 펫로스 신드롬 역시 처음 겪는 일이다.

반려견을 키운 역사가 깊고 관련 산업이 발달한 미국이나 유럽은 펫로스 신드롬에 대한 이해가 깊다. 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전문의료센터도 있고 정신과 상담을 받거나 약을 처방받는 일도 흔하다. 반려동물이 많아졌다고는 하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근처 어딘가에는 보신탕 집이 있고 개고기를 파는 시장도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도 키우지 않는 사람도 펫로스 신드롬은 낯설다. 개 하나 죽었다고 슬퍼 죽겠다는 사람을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친절한 사회가 아닌 것이다. 주변 분위기가 이 모양이니 스스로의 감정을 부정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증세는 오래가고 극복도 힘들다. 넘어갈 일도 병으로 키우는 셈이다. 몇 달이고 일상생활에 불편이 생길 정도라면 정신과 전문의를 찾기를 권한다.

펫로스 증후군을 잘 겪어내려면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첫 번째, 힘들고 슬픈 일을 극복해 가는 정상적인 단계, 즉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을 인정해야 한다. 고작 반려견 때문에 왜 이러나 눈치 보지 말고 충분한 애도기간을 갖자. 통상 2개월 정도는 마음껏 슬퍼해도 된다. (단, 직장이나 학교에 못 갈 정도는 곤란하다)

두 번째, 슬픔을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자. 주변에 마땅한 사람이 없다면 커뮤니티를 방문하는 것도 권한다. 우울증 환자가 제일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가 ‘그까짓 일로 우울해하냐’는 주변의 반응이다. ‘그까짓 개 한 마리 때문에’ 라던가 ‘부모라도 잃었냐’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당분간 멀찍이 피하는 게 상책이다. 멀리 한 김에 그런 배려 없는 사람과 다시 가까워져야 할지도 고민해 보기 바란다. 조금 슬픔이 가라앉았다면 세레모니를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반려문화가 우리나라보다 성숙한 서구에서는 나무를 심거나 반려견의 이름으로 기부를 함으로써 슬픔을 추억으로 승화시킨다. 반려견의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 걸어 두고 행복했던 기억을 떠 올리기도 한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츄를 키우는 처제는 화장 후 유골로 ‘메모리얼 스톤’을 만들겠단다. 나는 아직 도파가 구슬로 바뀐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지만 많이들 그렇게 한다고 한다.
 

사진_픽사베이


♦ 언젠가 올 이별

아직 반려견을 먼저 떠나보낸 경험은 없지만 막상 그 날이 닥치면 어떨까 가끔 생각은 해본다. 아마 나이가 제일 많은 세로토가 먼저 떠날 것이다. 적어도 세로토가 이런저런 노환에 시달릴 때 잘 돌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그다음은 도파가 떠나는 날이 올 거다. 온 가족이 다 슬프겠지만 특히 나는 많이 슬플 것 같다. 도파를 기억할 수 있는 영상이며 사진을 들여다보며 이겨 내려고 애쓸 것이고 늦기 전에 우울증 약도 챙겨 먹겠다. 무엇보다 도파 딸 니카가 가장 큰 위로가 되어 줄 것이다. 니카가 15살이 되는 2030년이면 나는 일흔을 바라보고 있을 거다. 100세 시대에 너무 늙어서라고 할 만한 나이는 아니지만 어린 강아지를 키울 만큼 기운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우리 가족에게 니카는 생을 같이 하는 마지막 반려견일 것이다. 집에서 태어나 핏덩이 때부터 키운 만큼 도파와는 또 다른 니카에 대한 각별함이 있다. 니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일생을 우리와 함께할 유일한 반려견일 것이다. 니카까지 떠나보낸 후 그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은 지금은 생각하지 않겠다. 아직 튼튼하고 기운 뻗치는 녀석들과 해 지기 전 산보라도 가야겠다.               

 

* 대한불안의학회
대한불안의학회는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소속 전문학회로, 공황장애, 강박장애, 사회불안장애, 범불안장애,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등 다양한 불안 및 스트레스 관련 질환에 대한 연구, 교육 및 의학적 진료 모델 구축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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