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윤희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 님의 사연>

안녕하세요. 얘기가 많이 길어질 것 같지만 꼭 도움을 받고 싶어서 글을 써봅니다.

제가 중학생 때 아빠가 일 때문에 집을 떠나 계시면서 주말에만 아빠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엄마가 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했고, 거의 매일 밤 새벽에 들어오시거나 외박을 하셨습니다. 엄마의 바람 사실을 알면서도 동생과 저는 어렸기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냥 모르는 척해야 했습니다. 

몇 년이 지난 뒤, 아빠가 일을 그만두셔서 다시 가족들이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빠가 돌아오신 후에도 엄마는 항상 새벽녘이나 아침에 들어오셨습니다. 고등학생이던 저는 학교가 끝나면 매일 독서실에 가서 쪽잠을 잔 후 독서실 문이 닫히면 집으로 와서, 집에 들어가지는 않고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엄마랑 치킨을 먹고 들어왔다, 찜질방에 다녀왔다 라는 식으로 핑곗거리를 만들기 위해서요. 그러면서 엄마에게 문자, 전화를 반복해서 했지만 엄마는 제 연락을 거의 다 무시했습니다. 한 번은 엄마의 내연남이 전화를 받아 엄마가 술에 취해 있다고 이야기 해준 적도 있는데, 너무 화가 났지만 엄마를 도와줄 수 없는 제 자신이 싫었던 기억도 나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마의 내연남은 엄마에게 폭력을 가했고, 엄마의 몸에는 목졸림의 흔적과 멍 자국이 항상 있었습니다. 

엄마를 새벽까지 기다리고 같이 집에 들어가면 아빠가 엄마를 때리고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저와 동생은 아빠를 말리고 엄마를 방어하느라 매일이 지옥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린 여자였던 저와 동생의 힘으론 역부족이었죠. 항상 생각했어요. 내가 성인 남성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싸움을 말리는 동안 제 동생은 매번 울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전 한 번도 운 적이 없고요. 너무너무 무섭고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전 엄마에게 애원도 해보고 명령도 해봤습니다. “제발 아빠랑 이혼해줘. 아빠랑 이혼 안 하면 나 자살할 거다. 내가 엄마 아빠 때문에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 모르겠다.”라고요. 그러나 엄마는 항상 너무너무 미안하다고 할 뿐 내연남과의 관계는 끊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저는 정말 자살하러 옥상에 올라갔던 만큼 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엔 엄마도 내연남과의 관계를 정리하려 많이 노력하고 저에게 의지도 많이 했습니다. 내연남은 엄마가 안 만나주면 아빠가 출근한 사이 집까지 찾아와 초인종을 누르고 나올 때까지 주차장에서 기다리는 등 스토커처럼 행동했고, 이에 엄마는 두려워하며 상담도 받고 내연남 친구들에게 연락해 도움을 요청하는 등 나아지려는 노력을 하셨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엄마는 계단에서 넘어지셔서 뇌출혈로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그때 병원에서 아빠가 하신 말이 생각납니다. 인생이 이렇게 허무한 거냐고. 아마 아빠도 엄마에게 많이 미안하셨겠죠. 본인이 매일 때리던 아내가 갑자기 죽을 고비에 처했으니까요. 저희 가족은 기적을 바랐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수차례 수술을 했지만 엄마의 의식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5년 넘게 의식 없이 눈만 뜬 채 병원생활을 하셨고,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사진_픽셀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저는 바로 외국으로 나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정말 힘들게 지나갔습니다. 예쁜 풍경을 봐도 ‘엄마는 이런 거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는데...’라는 생각에 눈물부터 났습니다. 하루도 잊지 않고 엄마 생각을 하려 했고, 엄마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고 자려고 누우면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어떻게 엄마 생각을 안 하고 하루를 보낼 수가 있어? 이런 마음이었죠. 엄마에 대한 감정은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지만 그래도 자주 혼자 울곤 합니다. 엄마의 인생이 너무 불쌍해서, 내가 해준 게 하나도 없어서,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어떻게 해야 될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었기 때문인지 전 중학생 때부터 우울증을 달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병원에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대학생 땐 학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심했고 결국 학사경고를 두 차례 받고 휴학했습니다. 학창 시절 힘든 가정환경 속에서 살면서도 이런 일들을 주변 친구들에게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금 이런 상황이고 그래서 힘들다”라는 얘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버텼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인이 된 지금도 감정표현에 많이 서툴러요. 

남에게 제 얘기를 잘 못하고, 말수도 적습니다. 

제가 제일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전 중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10년 넘게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없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셔서 정말 많이 힘들었지만 사람들이 있을 땐 절대 울지 않았습니다. 특히 엄마가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순간에는 너무 버티기가 힘들어 이를 악 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혼자 조용히 펑펑 울었어요.

이와 반대로 제 동생은 눈물이 정말 많아요. 같은 성정과정을 겪었지만 동생은 감정표현에 서툴지 않은 것 같아요. 

영화관에서 슬픈 영화를 봐도 절대 못 울지만, 제 취미는 혼자 노트북으로 슬픈 영화 보면서 울기입니다.

그렇다고 행복한 감정은 잘 표출하냐? 그것도 아닙니다. 저는 아직 외국 생활 중인데 제일 친한 외국인 친구가 “도대체 넌 감정이 있긴 하니? 행복하면 행복한 티를 내고, 슬플 땐 슬픈 티를 내줄 수 있겠니?” 묻더군요. 

저의 감정 표현에 관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요. 저도 남들처럼 기쁘면 팔짝 뛰고, 슬플 땐 슬프다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예 애초에 제 성격이 이렇게 형성된 것 같아 도저히 못 고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상담 치료도 받아보고 싶고 항우울제도 처방받아먹고 싶은데 외국에 있어서 병원 가기가 더 힘드네요. 

선생님들. 저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뇌부자들의 답장>

보내주신 이야기를 읽으면서 정말,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내오셨겠구나, 그리고 지금도 힘든 감정 속에서 살고 있으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어머니에 대해서 드는 원망과 그리움, 죄책감 같은 감정들의 영향을 지금도 하루하루 생활하는 데 받고 있으시다니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특히나 감정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슬픈 감정이든 기쁜 감정이든 표현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 역시나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어머니의 장례에서도 터져 나오는 감정을 억눌렀던, 그리고 혼자 와서 울었던 심정이 어떤 것이었을지… 

이렇게 감정 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상태를 ‘감정 표현 불능증(Alexithymia)’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감정과 타인의 감정에 둔감해지고, 감정과 관련된 신체적인 감각을 느끼더라도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나아가서 상대방의 행동과 대화에서도 감정적인 메시지를 인식하기 어려워합니다. 이들은 정서적인 각성으로 인한 신체 감각(심장이 두근거리거나, 얼굴이 붉어지고, 손이 떨리는 것 등)을 감정과 연결하고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보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감정에 대한 인식이 어렵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는 것 역시나 어려워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감정을 표현하고, 해소하는 것 역시나 어려움을 겪게 되죠.

감정 표현 불능증이 생기는 이유는 성장 과정에서 충분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공감받는 경험을 하지 못했거나, 또는 트라우마로 인해 감당하기 힘든 감정의 홍수를 겪었을 때 이렇게 감정 인식과 표현의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E님의 이야기에서 어머니가 외도하시는 상황,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반복되는 다툼과 폭력 속에서 청소년기를 지나셨다고 하셨는데요. 이런 일을 겪다 보면 정말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정말 많은 감정이 들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E님은 이런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고, 언제나 어머니나 아버지의, 그리고 동생의 감정을 신경 쓰고 챙겨야만 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게다가 어머니에 대해서 드는 감정도 한 가지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아무리 내연남과의 관계를 그만두라고 이야기를 해도 멈추지 못하셨던, 그래서 정말 원망하는 마음도 들고 답답하기도 하셨을 거예요. 한편으로는 내연남과 아버지에게 계속 폭력을 당하는 어머니가, 그럼에도 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정말 안타깝다는 마음도 드셨을 것이고요. 그런 상황에서 E님이 어머니에게 가지고 있던 감정을 충분히 이야기하고 해소하지 못한 시점에 어머니가 쓰러지시면서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사라지고, 그대로 막혀버렸을 것입니다.
 

사진_픽사베이


이렇게 E님은 오랜 기간 동안 우울한 감정 속에서 지내왔고,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해져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도 어떤 감정이 올라올 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에, 특히 대인관계 상황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작은 감정부터 인식하고 표현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거대한 감정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감정부터 이해하고 소화하고 표현하는 것이죠.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나 신체 감각이 들었을 때, 그 전후로 어떤 사건을 경험했는지, 그 사건에서 나는 어떤 감정과 생각을 느끼고 떠올렸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때 나는 나의 감정에 따라 어떤 행동을 했는지도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그 행동으로 인해 나는 어떤 것을 얻었고, 어떤 것을 잃었는지도 살펴보시고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억압되어 있는 감정에 대한 단서를 찾아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탐색의 과정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라든지 심리상담가 같은 전문가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살펴 나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금 E님이 외국에 있어서 전문가를 만나기 어렵다는 점이 안타깝네요. 혹시나 그래도 지금 계신 곳 근처에 한국인 치료사가 있다면 꼭 만나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한국인 치료사가 없다고 하더라도 현지인 치료사를 만나서 상담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화적인 차이야 있겠지만, 지금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지금 여기서’ 느껴지는 나의 감정, 그리고 그 순간 내가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게 한 장애물을 찾고 없애 나가는 것이니까요. 이런 순간순간에 사람에게 드는 감정은 문화적인 차이가 있어도 비슷한 경우가 많거든요.

그리고 지금 바로 치료사를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지금 옆에 있는 친구에게 지금 E님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어색한 감정 표현이겠지만 받아달라고 이야기해 보세요. 정말 사소한 감정들이라도, 네가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기쁘다든지, 어제는 너를 만나지 못해서 외로웠다든지 하는 것들, 이런 작은 감정들을 자꾸만 표현을 믿을 수 있고 의지가 되는 친구에게 해 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표현했을 때 친구의 반응을 느껴보고 들어보기도 하세요. 많은 사람들에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 한 명에게만 시작하는 거예요. 이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감정 표현 자체의 어색함은 많이 줄어들 수 있을 겁니다.

여기까지가 저희 뇌부자들이 드리는 이야기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억눌러왔던 감정들을 한 순간 다 깨어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금 당장 느끼는 감정들을 조금씩 표현하는 경험을 쌓아 나간다면 분명히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점점 더 익숙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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