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오동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A씨의 사연

안녕하세요, 도움을 청하고 싶어 어렵게 글을 씁니다.

저는 세 자매 중 둘째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저희에게 언어폭력과 신체폭력, 정서학대를 가해왔습니다. 본인만의 자잘한 규칙들을 만들어서 그것을 어기면 수시로 욕을 하고 칼을 드는 것은 예사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폭력 아래서 신음하면서도 문제를 회피하시기만 했습니다. 되려 아버지가 난리를 친 후 출근을 하고 나면 이게 다 저희 때문이라며 저희 옷을 벗겨 집에서 내쫓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우리 때문에 참고 살았다고 해서 어이가 없었지요. 우리는 그 집에서 죽지 못해 살았는데 말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당한 건 막내인 동생입니다. 동생은 아버지가 집에 들어왔는데 일어나지 않고 앉아서 인사했다는 이유로 목이 졸려 벽에 밀어붙여져 공중에 들어 올려진 적도 있습니다. 간신히 죽음을 면했지요. 게다가 오랫동안 성추행까지 당했습니다.

최근에 동생이 용기를 내어 이 일을 따져 묻자 아버지란 사람이 뭐라 그랬는지 아시나요? 먼저 유혹을 하는데 자신이 어떻게 참냐고 되려 화를 냈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결혼한 동생이 아들을 때리기 시작한 겁니다. 별 것 아닌 일로 조카를 엄청 때리고 집 밖으로 쫓아내고 아이는 울고불고 그야말로 집안이 쑥대밭입니다.

동생이 조카를 때리는 이유는 일부러 자신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라는데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저희를 때릴 때 했던 말과 똑같습니다. 동생이 실제로는 조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에,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사실이 너무나도 가슴이 아픕니다.

어떻게 해야 이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요?

사진_픽사베이

 

뇌부자들의 답장

안녕하세요 뇌부자들입니다. 짤막하게 축약된 사연이지만 어린 세 자매가 어떤 마음으로 그 긴 시간을 견뎌오셨을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어 너무나도 마음이 아픕니다.

 

안타깝게도 진료를 하다 보면 종종 트라우마가 대물림되는 사례들을 만나곤 합니다.

흔히들 부모는 아이의 거울 역할을 한다고 말을 하잖아요. 아이의 감정을 잘 읽고 거기에 알맞은 반응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면, 아이는 그런 부모의 말과 행동을 습득함과 동시에 내면에 하나의 표상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이 표상은 아이가 크면서 동일한 감정을 느꼈을 때, 부모의 도움 없이도 감정을 스스로 조절할 수 만들어 주는 기반이 됩니다.

그런데 사연자 분의 자매분들에겐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해줄 만한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어요. 어린 자매들이 보는 거라곤 화가 날 때마다 그것을 극단적인 공격성으로 표출하는 아버지의 모습뿐이었지요. 부정적인 감정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이것을 적절히, 부드러운 방식으로 다루는 방법은 배우지 못한 거죠.

그중에서도 특히 아버지에게 학대가 심했던 동생 분의 경우엔, 자매 분들에 비해 다른 관계를 통해 이러한 결핍을 보상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식은 자기에게 의존하는 힘없는 존재잖아요. 동생분께서는 타인에게 받은 분노와 화까지 저항할 수 없는 아들에게 쏟아 내면서 해소하고 계실 겁니다. 마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요.

 

또 다른 관점으로는 공격자와의 동일시(identification with aggressor)라는 방어기제가 작동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경험에서 파생된 두려움과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는데요, 두려워하던 대상과 동일한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이 더 이상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서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또 손상된 자존감을 복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던 학생이 시간이 지난 후 왕따 가해자가 되는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본인은 잘 알아차리지 못하지요.

 

사진_픽셀

 

우선 현재 시점에서 가장 급한 조치는 더 이상의 폭력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연자 분이 이러한 역할을 적극적으로 하기란 쉽지 않을 거예요.

현재 관계가 어떤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동생분의 마음속에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한 엄마, 언니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섣불리 동생을 비난하거나, 조카를 동생으로부터 떼놓으려 했다간 굉장히 공격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죠.

저는 아동학대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기관의 도움을 받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지자체마다 ‘아동 보호 전문 기관’이 하나씩 있습니다. 이런 기관들은 아이와 어머니가 적절한 상담이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경우에 따라 아이를 분리하는 등의 실제적인 조치를 돕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의 원인이 된 동생분의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가 필요하겠지요.

동생분은 복합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Complex PTSD)의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러한 경우 궁극적인 치료의 목표는 처리되지 못한 외상 기억을 재처리 함으로써 통합하는 것이지만, 기억을 직접 다루기에 앞서 동생 분이 어느 정도 정서적으로 안정되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약물 치료가 선행되어야 하고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진 않겠죠. 그래서 가족 분들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동생 분의 마음속에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분명히 있을 테니, 치료를 받는 게 아이를 위한 길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며 부드럽게 설득해 보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의 답변이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사연자 분 가족의 상처가 하루빨리 아물어서 행복하게 지내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뇌부자들 드림.

 

 

[더 자세한 내용들을 팟캐스트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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